• - 율명 (律名)
    음악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로 나타내는 예술'이라 했을 때, 음악의 유일한 매체는 소리(Sound)이다. 소리 가운데서도 음악에 주로 쓰이는 소리는 고른 진동을 하는 '고른음(Tone)'으로, 이 고른음은 높낮이(高低)/길이(長短)/셈여림(强弱)/음빛깔(音色)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음악에서는 일정한 높낮이를 지닌 음을 골라 쓰는데, 무수한 음 가운데 특정한 음을 고르는방법은 민족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다. 높은 수준의 음악 문화를 지닌 문화권이나 민족들은 음악에 쓰이는 음을 정밀한 방법에 따라 산출하고,그 음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국악에서는 이러한 음을 '율(律)'이라 하고, 음이름은 '율명(律名)이라 부른다.
    국악에서는 <삼분손익 법(三分損益法)>이라 하는 음계 산출 방법에 따라 한 옥타브를 12개의 율(12율)로 나누고, 각 율은 두 자로 된 한자(漢字) 이름이 붙여져 있다.
    기본음이 되는 황종(黃鍾)의 소리를 내는 율관(律管)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율관 길이를 3등분하고, 그 중에서 1/3을 제거한 나머지에 해당하는 길이의 율관으로 소리를 내었을 때, 완전 5도 높은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 임종(林鍾)으로 삼는다. 이를 '삼분손일(三分損一)'이라 한다. 그리고 임종 율관의 길이를 3등분하여 그 1/3에 해당하는 길이 만큼을 임종 율관에더한 길이의 율관에서 나는 소리는 임종 보다 완전4도 낮은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태주(太주)로 삼는다. 이를 '삼분익일(三分益一)'이라 한다. 삼분손일과 삼분익일을 반복하여12율을 얻게 되는데, 삼분손일에 의하여 만들어진 여섯 음을 음려(陰呂)라 하고, 삼분익일에의하여 만들어진 여섯 음은 양율(陽律)이라 한다. 양(陽)의 육률(六律)과 음(陰)의 육려(六呂)를 합한 12율을 가리켜 '율려(律呂)'라고도 한다. 한자로 표기되는 율명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은 같은 율명을 쓰고 있으나, 일본은 일부의 율명 표기가 다르다.
    우리나라 음악의 경우도 율명이 적용되는 음악은 궁중음악이나 정악계통의 음악에만 국한되며, 민요나 판소리 산조 등의 민속음악에서는 율명을 쓰지 않는다.
    12율을 산출하기 위한 기본음인 황종(黃鍾)의 음높이는 음악의 계통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거문고나 향피리 등 향악기가 편성되는 향악(鄕樂)에서는 황종의 음높이가 '내림 마(E♭)'에 가깝다. 향악이란 본래 당악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모든 궁중음악을가리켰으나, 후에는 민간의 풍류(風流)까지 포함되고 있다. 향악이란 용어는 통일신라때부터쓰이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속악(俗樂)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주로 가야금?거문고가 편성되는 음악이 향악에 속하며, 판소리/산조 등을 가리키는 민속악(民俗樂)과는 구별된다. 이 향악의 황종음은 '내림 마'에 해당한다.

    둘째 아악(雅樂)이나 당악(唐樂)에서의 황종은 '다(C)'에 가깝다. 본래는 궁중의 의식에 사용되던 중국계 음악 중 일부를 가리켰던 '아악'은 근자에 이르러 궁중음악과 풍류음악 모두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좁은 의미의 아악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음악은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유일하므로 흔히 아악이 곧 제례악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편종?편경 등의 아악기가 주로 편성된다. 당악이란 당나라를 비롯한 중국에서 전해진 음악, 주로 중국 궁정 연회에서 쓰이던 속악(俗樂)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에 중국 송(宋)나라에서 전래된 낙양춘(洛陽春), 보허자 등이 이 당악에 해당한다. 또 조선 초기에 중국음악의 양식(樣式)을 모방하여 창제된 음악도 음악양식적인 면에서 당악에 속한다. 편종/편경이 편성되거나, 당피리가 주선율을 연주하는 이 당악의 황종은 '다'에 해당한다.
    - 기보법
    국악에 쓰이는 기보법은 종류가 매우 많다 고려시대부터 쓰였다고 하는 육보(肉譜)를 비롯하여 율자보(律字譜)?합자보(合字譜) 등이 있으며, 연음표(連音標)도 일종의 기보법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널리 쓰이는 기보법은 정간보(井間譜)와 오선보(五線譜)이다.
    정간보(井間譜)는 종이에 네모난 관(이를 '井間'이라 함)을 세로로 이어 그리고, 그 속에 율명의 첫 글자를 한자(漢字)로 적어 기보하는 것으로 조선 세종(世宗)때 창안되었다. 한 칸이 박자의 단위가 되어 흔히 한 박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안에 율명의 첫 글자를 적어 음의 높이를 표시한다. 이 정간보는 전통음악을 기보하는 데 주로 쓰이는 반면, 최근에 새롭게 창작된신국악(창작국악이라고도 함) 작품은 편의에 따라 서양식의 오선보를 쓰며, 역시 근자에 채보(採譜)되는 산조나 민요의 악보도 오선보를 사용하고 있다.

    ① 정간보 읽기

    - 음높이 읽기
    정간보에서 음의 높이는 정간 안에 쓰여진 문자로 나타낸다. 문자는 율명의 첫 글자를 한자로 표기하는데, 옥타브 표시는 문자의 변(邊)에 따라 구별된다. 즉 기본음인 황종은 '黃'으로표기하고, 한 옥타브 높은 음은 삼수변을 붙여 '潢'으로 나타내며, 두 옥타브 높은 음은 삼수변 두 개를 붙여 '潢'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한 옥타브 낮은 음은 인의 율명에 삼수변을 붙이는 것은 '淸聲'의 '淸'에서 따온 것이며, 옥타브 낮은 음에 인변을 붙이는것은 '倍聲'의 '倍'에서 따온 것이다.
    옛날에는 국악에서 옥타브 아래나 또는 옥타브 위의 음을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기준 음역(音域)인 중성(中聲)에서 한 옥타브 높은 음역인 청성(淸聲)을 표기하는 방법은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쓰여졌으나, 옥타브 낮은 음역인 배성(倍聲)을 표기하는 방법은 『세종실록 악보』에서 율명을 붉은 색의 글씨로 표기한 경우가 있을 뿐, 그 이후로는 배성을 악보에 사용한 예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개화기 이후에 음역이 넓은 음악을 기보하기 위하여 율명 앞에 인변을 붙이는 방법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 - 음길이 읽기
    정간보에서 한 정간(칸)은 한 박이다. 정간보가 세종대왕에 의해 처음 고안된 때가 15세기중엽이므로, 동양문화권에서는 가장 앞선 유량악보(有量樂譜)가 된다.
    정간보의 한 정간이 한 박일 때, 그보다 긴 음은 정간의 수에 따라, 그보다 짧은 음은 정간속에 쓰여진 율명의 위치에 따라 길이가 결정된다. 즉 한 정간에 율명 하나가 있으면 그 음은 한 박이 되고. 한 정간에 율명 하나가 있고 그 다음 정간이 빈 칸으로 남아 있으면 그 음은 두박이 된다. 즉 빈 정간은 앞의 음의 연장을 나타낸다.
    한 정간의 윗 부분에 율명을 쓰고, 그 아래에 짧은 횡선을 그어 놓은 것도 한 박으로 해석된다. 이 짧은 횡선은 앞의 음이 연장된다는 표시로, 한 정간(한 박)이 어떻게 분할되는지 분박(分拍)되는 리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한 박이 2분박으로분할되는지, 또는 3분박으로 분할되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정간에 두음이 위아래로 적혀 있으면 시가가 2등분 되고, 세음이 나란히 적혀 있으면 3등분된다.

    한정간 안에 여러 음이 있으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읽는다. 그리고 율명이 좌우로 나란히있으면 그 분박에 해당하는 시가가 다시 세분(細分)되는 것이다. 흔히 쓰이는 정간보는 1/5박까지는 율명을 적어 표기하지만, 그 보다 더 짧은 음은 장식음 부호를 이용하여 나타내고,'덧 길이'와 '반 길이'는 점과 종선(從線)으로 표기하는데 ' |'(덧 길이 표)가 붙은 음은 본래길이의 1.5배로 ' ?'(반 길이 표)가 붙은 음은 본래 길이의 반으로 연주한다.
    정간보를 읽는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 줄에서 왼쪽 줄로 읽어나간다. 다만 정간 속의 율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은 다음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정간보에 쓰이는 중요한 부호는 다음과 같다.


    ① 오선보 읽기
    국악을 오선보로 표기하는 방법은 서양음악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같고, 다만 국악의 특징적인 부분을 나타내기 위한 약속이 조금씩 다르다. 현재 국악계에서 쓰이고 있는 오선표기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음높이 읽기
    <향악(鄕樂)의 경우>

    향악에서는 기본음인 황종을 내림 마(E♭)로 표기하므로, 주로 내림표(♭)을 조표로 사용한다. 악곡의 조(調)에 따라 조표는 달리 붙이지만, 율명은 변함 없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이점은 서양음악의 음명(音名)과 같다.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의 경우>

    아악과 당악의 황종은 다(C)음에 해당하므로 조표를 사용하지 않거나 또는 올림표(#)나 내림표(♭)를 경우에 따라 사용한다.


    <그 밖의 경우>

    판소리나 산조?민요의 경우나 최근에 새롭게창작되는 음악의 악보는 일관성을 찾기 어렵게 기보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악보에서는나름대로의 '범례(凡例)'를 두고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여 음높이를 해석하면 된다.
    - 음길이 읽기

    오선보로 표기된 국악의 악보에 표기된 시가(時價)는 서양음악의 표기법과 같다. 다만 3분박 계통을 많이 사용하는 음악에서는 점4분음표를 박자의 단위로 삼기도 하는데, 이 경우12/8 또는 첫 f '등의 박자표를 쓰기도 한다.

    그 밖의 부호

    국악의 다양한 시김새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호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인 몇 가지만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소리를 위.아래로 폭 넓게 떠는 표
    : 소리를 위.아래로 잘게 떠는 표
    : 처음은 굵게, 나중은 가늘게 떠는 표
    : 소리를 위로 밀어 올리는 표
    : 소리를 아래로 끌어 내리는 표
    : 소리를 점점 여리게 밀어 올리는 표
    : 소리를 점점 여리게 끌어 내리는 표
    : 음 높이가 일정치 않은 음
    : 소리를 떨며, 끌어 내리는 표

    이 밖의 부호는 각 악보의 범례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참고하면 된다.

    ③ 옛악보

    지금은 잘 쓰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널리 쓰이던 기보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율자보(律字譜)>
    12율명의 천 글자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었다. 4音1句의 규칙적인 리듬을 갖는 아악(雅樂)을 기보하는 데 쓰였다.

    <오음약보(五音略譜)>
    5음음계로 이루어진 향악을 기보하기 위하여 세조때 창안된 기보법.궁(宮)을 중심으로 음계상의 음들을 위?아래로 구분하여 '上一.上二?上三' 또는 '下三?下四 下五'등으로 표기하여 차례대로 숫자로 적었다.

    <육보(肉譜)>
    악기의 소리를 흥내 내는 의성어를 구음(口音)이라 하는데, 구음에는 악기마다 고유한 약속이 있다. 이 구음을 적어 악기의 음높이나 연주법을 나타낸 악보를 육보라 한다.

    <합자보(合字譜)>
    거문고?가야금?비파 등의 현악기 연주에 필요한 운지법(運指法)?탄법(彈法)?농현법(弄絃法) 등을 간단히 부호화한 다음, 이들 부호를 모아 적은 기보법. 조선시대 거문고 악보의 대표적인 기보법으로 음악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연음표(連音標)>
    가곡을 전문적으로 부르던 '가객(歌客)'들 사이에서 쓰이던 것으로, 노래의 가사 옆에 선율의 흐름을 암시하거나 독특한 주법을 부호로 적어 놓던 기보법으로 『가곡원류(歌曲源流)』등에 쓰였다. 이 밖에도 20여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기보법이 쓰였으나,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다만 옛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옛 악보(古樂譜)가 해독되고 있다.
    - 장단

    장단은 마치 서양음악의 무용곡에 쓰이는 리듬형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즉, 폴로네이즈리듬이나 미뉴엣?왈츠 등과 같이 이 리듬형(장단)은 그 악곡의 기본적인 리듬이 될 뿐,그 악곡의 모든 선율이 이 리듬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 전통음파의 장단은 그 음악에 내재된 리듬의 골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불교음악인 범패나 문묘제례악 ,또는 매우 느린 민요-특히 상여소리나 김매기 소리 가운데 느린 음악-의 경우는 장단을 찾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국악곡은 일정한 리듬형에 의하여 음악이 짜여진다. 장단을 갖지 않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국악의 연주에는 기악이든 성악이든 언제나 장단의 반주가 따른다. 장단은 흔히 장구로 치지만 판소리나 단가에서는 북을 쓰며, 풍물놀이(농악)에서는 장구, 북에 꽹과리와 징이 함께 치기도 한다.
    각 장단은 일정하게 정해진 리듬꼴이 있으며, 고유한 빠르기(tempo)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장단은 단순히 리듬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템포가 결합된 총체적 개념이며, 정해진 리듬꼴도 실제 연주에서는 연주자(고수)의 즉흥적인 해석에 따라 자유롭게 변주하여 친다.
    장단은 다양한 길이와 리듬으로 구성된다. 정해진 길이의 장단에서 장구나 북을 치는 것을 점(點)'이라 하는데, 장구 장단에서 점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 덩(떵) - 장구의 북편과 채편을 동시에 치는 것
    : 덕 - 장구의 채로 채편을 친다.
    : 기덕 - 앞 짧은 꾸밈음을 붙여 '덕'을 치는 것
    : 쿵(궁) - 장구의 북편을 치는 것
    : 더러러러 - 채로 채편을 굴려 소리 내는 것

    장구로 반주를 할 때는 오른손에 채를 쥐고, 왼손은 맨손으로 치지만, 실외음악이나 사물놀이 등에서는 왼손에 궁굴채를 쥐고 친다. 그리고 오른손의 채로는 장구 채편 가죽의 가운데부분인 '복판'을 치는 것이 일반적이나, 독창이나 독주의 반주나 실내악 연주에서는 음량이 작은 변죽을 친다.
    반면에 판소리의 반주에 쓰이는 소리북은 오른손에 북채를 쥐고 가죽면인 채궁(채궁편)과북통을 치고, 왼손은 맨손으로 궁편을 친다. 특히 북채로 북통을 치는 방법은 다양한데, 장단이나 음악의 상황에 따라 북통의 윗 부분인 '온각'자리와 모서리 부분인 '매화점'자리, 북통의 앞 부분인 '반각'자리 등을 친다.

    ① 덩(떵) '합궁'이라고도 하며, 좌우를 동시에 침. 주로 장단의 첫박에 해당한다.
    ② 궁(쿵) : 왼편의 북면을 왼손으로 친다. 짧은 앞꾸밈음을 넣으면 '쿠궁'이 된다.
    ③ 닥(딱) 북채로 대점(온각자리)를 세게 친다.
    ④ 다드락 : 북채로 소점(반각자리)이나 매화점자리를 리듬에 따라 여러번 친다.

    궁중음악이나 풍류에서는 비교적 정해진 리듬을 충실하게 치지만, 산조나 판소리 등의 음악에서는 즉흥적인 변주가 활발하다. 우리 전통음악에서 장단을 치는 고수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판소리의 경우인데, 판소리의 고수는 북을 쳐서 음악의 장단을 맞추는 역할 이외에도, 정해진 장단의 틀 속에서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의 기능까지를 소화해 내며, 특히 추임새를 통하여 음악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추임새'란 고수가 입으로 소리내는 '으이, 좋지, 좋다, 얼씨구, 잘한다?.?'등의 일종의 감탄사를 가리키는데, 이 추임새는 소리하는 명창의 흥을 돋우는 역할뿐만 아니라, 음악의 리듬적인 공백을 메꾸는 역할도 하므로, 판소리에서는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고수뿐만 아니라 관객도 이 추임새를 통하여 음악에 참여할 수 있다.

    흔히 쓰이는 장단의 기본형은 다음과 같다.
    - 음계와 선법
    ① 음계
    음악에 쓰이는 음들은 음높이의 순서에 따라 한 옥타브 안에 모아 정리한 것을 음계(Scale)라 한다. 흔히 음계를 선법(Mode)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양음악의 장음계?단음계도 실은 선법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음계의 이름은 다양하게 붙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옥타브 안에 나타나는 음의 수에 따라 붙여진다.
    향악이나 민속음악과 같이 우리나라의 음악은 대부분 5음음계로 되어 있다. 이 5음 음계중에는 반음이 없이 단3도와 장2도 만으로 구성된 것이 있는가 하면, 반음이 있는 5음 음계도 남도지방(전라도 및 충남 일부) 음악에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 전해진 음악은 주로 7음음계로 되어 있다. 즉 현재의 문묘제례악은 중국 아악의 음악양식을 따라 세종때 만든 음악인데, 이 음악은 다음과 같은 7음음계로 되어 있다. 서양의 7음음계와 비교하여 반음의 위치가 다름에 유의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7음음계는 궁조(宮調)이다.

    한편, 당악에 속하는 <낙양춘>이나 조선 세종때 중국 당악의 음악양식을 따라 만든 <여민락령> 또는 종묘제례악 중 <진찬>은 모두 7음음계로 되어 있으나, 궁조인 문묘악과는 달리 치조(徵調)이다. 치조는 다음과 같이 서양음악의 장조(Major)와 같은 구조이다. 즉궁조 7음음계는 중국 아악식이며, 치조 7음음계은 중국 속악이나 한국식 음계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여러 지방의 민요에는 3음음계나 4음음계도 있으며, 궁중음악 계통의 음악에는 부분적으로 6음음계도 발견된다.

    ② 선 법
    국악에 많이 쓰이는 선법에는 솔-선법인 평조(平說)와 라-선법인 계면조(界蘭調)가 있다. 국악의 선법을 설명하는데 서양식의 계명창법을 이용하는 것은 이해의 편의를 위함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악의 선법을 설명하며 중국식의 계명인 '궁상각치우(官商角徵羽)'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국음악의 선법에 궁조(害調) ?상조(商調)등이 있다고 한 설명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평조(501 선법)
    평조는 솔-라-도-레-미의 5음으로 구성되며, 솔로 마치는 선법이다.

    평조선법은 악곡에 따라 솔이 최저음이 되는 경우(정격 선법)와 레가 최저음이 되는 경우(변격 선법)가 있다.

    ♣ 계면조(또 선법)
    계면조는 라-도-레-미-솔의 5음으로 구성되며, 라로 마치는 선법이다.

    계면조 선법은 악곡에 따라 라가 최저음이 되는 경우(정측 선법)와 미가 최저음이 되는 경우(변격 선법)가 있다. 그러나 계면조는 실제 음악에서 5음음계로 보다는 한 음이나 두 음이 생략된 4음음계와 3음음계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남도음악에서는 반음을 포함하는 유반음 5음음계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판소리나 산조와 같은 전문적인 음악에서는 한 곡 안에서 수시로 조(調)를 바꾸어 쓰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조바꿈이 자주 나타나는 경우는 선법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 지역에 따른 선법
    지역에 따라 풍습이나 방언이 서로 다르듯이 그 지방에서 주로 쓰이는 음악의 선법도 다르다.

    <경기 지방>
    서울?경기지방의 음악은 주로 5음음계로 되어 있으며, 선율 진행은 순차진행이 많아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경기민요는 <도라지타령>과 같이 솔-라-도-레-미의 5음음계이며 최저음과 마침음이 모두 솔인 점에서 이 선법은 정격 솔선법이며, 평조이다 반면에 널리 알려진 신민요인 <아리랑>은 그 구성음이 솔-라-도-레-미의 5음음계로, 최저음도 솔이지만, 도로 마치는 도선법(변격 도픈법)이다. <천안삼거리>나 <경북궁타령>은 라-도-레-미-솔의5음음계로, 라로 마치는 라선법이다.


    <남도 지방>
    전라도지방과 충청도 일부(주로 금강 이남 지역)의 음악은 흔히 '육자백이 토리' 또는 '남도계면조' 라고하는 반음이 있는 5음음계로 되어 있는데, 이 선법은 상행선율과 하행선율의 구조가 서로 다르다. 즉, 상행선율에서는 무반음 4음음계가 되고, 하행선율에서는 유반음 5음음계가된다. 그러나 반음은 주로 짧은 시가로 되어 있고, 반음을 구성하는 윗 음에 강세가 온다. 이 육자백이 토리에서는 미음을 폭 넓게 떨고, 라음은 떨지 않기 때문에 미를 '떠는 목', 라를 '평으로 내는 목'이라 하며, 도-시의 급격한 하행 반음은 '꺾는 목'이라 하는데, 이 하행선율에서 육자백이 선법의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다. 미가 최저음이고 라가 마침음인 점에서 이 선법은 변격 라선법이며, 계면조이다.

    <동부 지방>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동쪽지역인 이 지방의 음악은 흔히 '메나리 토리' 또는 '메나리조'라고 하는 선법으로 구성되었다. 이 선법은 상행시에는 4음음계, 하행시에는 5음음계로 된 무반음 음계로, 미-(솔)-라-도-레-미로 구성되는데, 미가 최저음이고 라로 마치는 점에서 변격 라선법이며, 역시 계면조이다. 이와 같은 선법은 함경도 지방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며, 충청도나 경기도에서도 간혹 쓰이고 있다. 특히 불교음악이나 글읽는 소리에 자주 나타난다. 강원도?경상도민요에서는 라-솔-미의 하행선율에서 이 선법의 특징이 드러난다.


    <서도 지방>
    황해도 평안도 등의 관서지방 음악에는 '수심가 토리'와 '난봉가 토리'가 대표적인데, 이들 선법은 무반음 5음음계로, 마치는 음이 아래에 있고, 그 5도 위의 음을 잘게 떠는 것이 특징이다. 평안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심가 토리는 레-미-솔-라-도의 구성으로 레가 마치는 음이며 라를 떤다(정격 레선법). 반면에 황해도를 중심으로 하는 난봉가 토리는 라-도-레-미-솔의 구성으로 라가 마치는 음인며, 미를 떤다(정격라선법). 또한 향토민요 중에는 솔로 마치는 선법도 있다.
    이들 선법의 특징은 떠는음에서 마침 음으로의 5도 하생시에 두드러지는데, 수심가토리는 솔을 생략하고 라-미-레로 마치며, 난봉가 토리는 레를 생략하고 미-도-라로 마친다.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북한지역에서 쓰이는 선법에 레-솔로 하행하여 마치는 경우, 도를 생략하고 레-라-솔로 진행하는 선법도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5도 하행시에 두번째 음을 생략하는 것이 관서?관북지방 음악의 한 특징으로 추측된다.


    <서도 지방>
    함경도 지방은 우리 국토의 동해안지역이라는 점에서 강원도 ?경상도 지방의 음악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또한 북쪽에 있다는 점에서 평안도나 황해도 음악과 비슷한 점도 있다. <신고산타령>이나 <궁초댕기>는 강원도 ? 경상도와 비슷하며, <애원성>은 평안도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제주도 지방>
    제주도 지방을 대표하는 선법을 어느 하나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우나, 다른 지방에까지 널리 알려진 통속적인 민요인 <오돌또기>의 선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오돌또기> 선법은 라-도-레-미-솔의 무반음 5음음계이며, 레로 마치는 변격선법이다.

    우리나라 여러 지방의 독특한 선법에 관하여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조

    조(調)란 말은 국악에서 퍽 다양하게 쓰인다. 평조 ?계면조 등과 같이 '선법'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남도쪼(南道調) ?서도쪼(西道諸)와 같이 '지역적인 특징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서양음악의 경우와 같이 조(Key)의 뜻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서양음악의 경우와 같은 Key의 의미로 설명하고자 한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국악에 다음과 같은 7개의 조(七調)가 있었다.

     

    악학궤범 7조

    각조의 으뜸음

    본래 이름

    우리말 이름

    율명

    서양음명

    낙시조(樂時調)

    또는

    평조(平調)

    일지(一指)

    한가락

    협종 고선

    G♭, G

    이지(二指)

    두가락

    중려/유빈

    A♭,A

    삼지(三擔)

    세가락

    임종

    B♭

    횡지(橫指)

    빗가락

    이칙/남려

    B, C

    우조(羽調)

    횡지(橫指)

    빗가락

    이칙/남려

    B, C

    우조(羽誤)

    웃조

    무역/응종

    D♭,D

    팔조(八調)

    팔팔조

    황종

    E♭

    막조(激調)

    막막조

    대려/태주

    E, F



    「악학궤범」에서는 7개의 조를 둘로 나누어 높은 조를 우조(羽調)라 하였고, 낮은 조는 낙시조(樂時調)라 하였는데, 낙시조는 곧 평조(平調)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調)의 이름에도 평조(平調)가 있고, 선법 이름에도 평조가 있어 혼동의 여지가 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빗가락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불리던 횡지(橫指)는 경우에 따라 우조에 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시조에 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위의 7포 가운데서 평조에서는 삼지(세가락)가 많이 쓰였고, 우조 가운데서는 팔조(팔팔조)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임종을 으뜸음으로 삼는 조를 평조라 하고, 황종을 으뜸음으로 삼는 조를 우조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정악(正樂)에서는 평조는 인종(B♭)을 으뜸음으로, 우조는 황종(E♭)을 으뜸음으로삼는 조를 가리키며, 이 두 가지의 조가 가장 널기 쓰인다. 우조와 평조의 두 가지 조로, 평조와 계면조의 선법을 오선과 율명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평조계면조> - 임종(B♭)이 주음이 되는 라 선법


    <우 조> - 황종(E♭)이 주음이 되는 솔 선법


    <계면조 (우조, 계면조)> - 황종(E♭)이 주음이 되는 라 선법

    민속음악에서는 '청'이라 하여 다양한 조가 쓰이고 있기는 하나, 국악기의 대부분이 12율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7조가 모두 쓰이기는 어렵다. 이 점은 악기를 개량하면 해결될 문제이나, 전통적인 음색의 보존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할 문제이므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며, 이미 상당한 연구와 악기개량의 성과가 있었으므로, 머지 않아 국악기로도 다양한 조의 연주가 가능할 것이다

    현재 민속음악의 연주에서 쓰이는 '청'을 산조대금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산조청 : 산조대금의 여섯 지공을 모두 막고 연주하는 조로 위로부터 세 지공만 막은음을 본청(주음)으로 삼아 연주한다. 이를 6관청이라 한다.
    ② 민요청 산조대금의 지공 가운데 다섯 지공만을 활용하여 연주하는 조로, 위로부터 두 지공을 막은 음을 본청으로 삼아 연주한다. 산조청에 비하여 장2도 높은 조로 이를 5관청 이라 한다. 산조나 판소리의 경우는 악곡 도중에 다양한 전조(轉調)가 일어나는데, 그 경우 주로 전조청이라고도 하는 ‘엇청'을 이용하여 조를 바꾼다. 4도 높은 조로의 전조는 본청의 4도 원음인 엇청을 본청으로 바꾸며, 이 경우보다는 드물지만 4도 낮은 조로의 전조는 본청의 4도 아래음인 '떠는청'을 본청으로 바꾼다.
    - 농현과 요성
    국악은 화음이 없이 선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따라서 선율을 구성하는 각 음이 음악적인 문맥 속에서 의미를 갖기 위하여 각 음마다 독특한 시김새를 갖는다. 즉 어떤 음은 떨고, 어떤 음은 끌어 내리고, 경우에 따라 어떤 음은 변화를 주지 않고 평으로 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음악을 구성하는 음조직 속에서 각각의 음이 독특한 기능을 갖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음을 변화시키는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이 요성(搖聲)이나 농현(弄絃)이다.

    요성은 성악이나 관악기 음악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이며, 농현은 가야금이나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 음악에 주로 쓰이는 용어로 이 두 용어의 뜻은 같다. 농현에는 단순히 '소리를 떨어 표현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소리를 끌어 내리는 퇴성(退聲)이나, 소리를 밀어 올리는 추성(推聲)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악이라고 하여 모든 음을 다 떨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악곡에 따라, 또는 그음악의 조(調)에 따라 농현(요성)하는 음이 다르고, 변화하는 음높이의 폭도 다르므로, 그 때마다 세심히 익혀야 한다. 대체로 감정이 절제되어 표현되는 궁중음악이나 풍류의 경우는 농현이 깊지 않고,그 정도도 비교적 약하나, 민요나 판소리?산조와 같은 음악의 경우는 농현의 폭이 깊고, 그 쓰임새도 많다.

    농현이나 요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요소가 아니라 한국음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음악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의 하나이다. 농현과 요성이 있음으로써 한국적인 음악의 표현이 비로소 가능하여 진다.
    - 조직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성부가 짜여진 상태'를 조직(粒織, Texture)이라 한다. 국악의성부 짜임새는 화성적(Homophonic texture)이거나 다성적(Polyphonic texture)인 것을 찾기 어렵다. 독창이나 독주, 그리고 제창(齋唱)이나 제주(齋奏)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은 국악은 단선율음악(Monophonic texture)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음악에서는 각 악기의 특성이나, 연주자의 개성에 따라 부분적인 장식과 변주가 가능하며, 여러 성부가 본질적으로 같은 가락을 연주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가락을 연주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성부 짜임새를 이음성음악(異音性音樂, Heterophonic Texture)이라 한다. 따라서 독창이나 독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악곡은 헤테로포니에 속한다고 하겠다.

    반면에 가락 악기나 인성(人聲)이 전혀 쓰이지 않는 <사물놀이>와 같은 음악은 선율을 연주하는 성부가 없으므로, 무선율음악(無旋律音樂, Non-melodic texture)에 속한다.
    - 형식
    국악의 형식(Musical form)은 다양하여 몇 가지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형식 몇 가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성악곡의 형식

    ♣ 민요의 형식
    민요는 크게 '통속민요(通俗民謠)'와 '향토민요(鄕土民謠)'로 나뉘는데, 통속민요는 유행민요라고도 하며 주로 흥겨운 놀이 좌석에서 부르는 것이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반면에 향토민요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하여 전승되는 것으로, 주로 일을 하면서 부르던 일노래(勞動謠)나 부녀자들의 노래, 또는 어린이들의 동요(童謠)가 여기에 속한다.
    통속민요는 주로 후렴을 가지고 있는 유절형식(有節形式)의 노래로, 여럿이 부를 때는 독창으로 앞소리를 부르고, 후렴은 다 같이 부른다. 그러나 서양의 노래처럼 반드시 각 절(節)의 가사 다음에 후렴이 오는 것이 아니라 후렴과 후렴 사이에 각 절의 가사가 놓이는 형태의 노래도 있다(서양음악의 한 절에 해당하는 단위를 국악에서는 '한 마루' 또는 '한 마디'라 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 노래의 특징은 후렴구(後斂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노래의 후렴 구에서 되풀이되는 음절이나,또는 후렴구의 첫 부분에 나타나는 말을 따서 그 노래의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향토민요는 일노래에 속하고, 많은 인원이 규칙적인 동작을 반복하며 작업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메기고 받는 방법'으로 노래한다. '메기고 받는 방법'이란독창으로 앞소리를 메기고, 여럿이 뒷소리를 받으며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메기는 소리는 즉흥적으로 가사를 지어 부를 수 있고, 가락도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소리는 대부분 규칙적인 가사와 가락으로 되어 있다.

    일노래 중에서도 지방이나 악곡에 따라, 받는 소리가 없이 한 절의 앞부분을 독창으로 부르고, 뒷부분을 제창으로 이어 부르는 '메기고 다는(先入後齋唱) 방법'으로 부르는 노래도 있으며, 혼자 작업하며 부르는 일노래 중에는 메기고 받지 않으며 독창으로 부르는 노래도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향토민요 형식은 같은 가락이 되풀이되는 점에서 유절형식의 노래라 할수있으며, 각 절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메기는 소리를 자유롭게 변주한다는 점에서는 변형유절형식의 악곡으로 볼수도 있다.

    ♣ 가곡과 시조 형식

    가곡과 시조는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쓰고 있는 점은 같으나, 노래의 형식은 크게 다르다.
    가곡은 본래 여러 곡을 계속하여 노래하던 음악으로, 각 곡의 형식은 대여음?초장?2장?3장?중여음?4장?5장으로 되어 있다. 대여음은 진주의 역할인 동시에 후주의 기능을 하며 다음노래로 연결되고, 중여음은 간주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첫 곡인 초삭대엽(初數大葉)은 '다스름(調音)'이라는 전주에 이어 초장부터 연주된다. 각 곡은 통절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여러 곡끼리는 앞의 곡을 조금씩 변주하여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로 본다면 A-A'-A"….등으로 볼 수 있다.
    시조는 시조시의 형식과 같이 초장?중장?종장의 세 부분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짧은 전주가 있고, 초장과 중장의 끝에는 짧은 여음이 붙어 있다. 평시조?사설시조?지름시조 등은 a-b-c로 볼 수 있다.


    가곡과 시조의 형식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시조

    가곡

    (없음)

    대여음

    초장

    초장

    2장

    중장

    3장

    (없음)

    중여음

    종장

    4장

    5장



    ♣ 가사와 잡가의 형식

    가사(歌詞)와 잡가(雜歌)는 비교적 긴 사설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은 짧은 사설을 지닌 민요나 가곡, 시조와 구분된다.
    가사(歌詞)는 현재 12곡이 불리고 있기 때문에 흔히 12가사라고 한다 가사에는 <백구사(白鷗詞)>와 같이 후렴이 없는 노래와 <죽지사(竹枝詞)> 처럼 후렴이 각 절의 뒷 부분에 붙는 노래가 있는데, 대부분 여러 절(節)로 나뉘어져 있다. 각 절의 가락은 대개 비슷하며, 같은 가락이 되풀이되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가사는 유절형식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잡가(雜歌)는 전문적인 소리꾼들이 부르던 노래로 좌창(座唱)과 입창(立唱,선소리)으로 구분된다.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로 대표되는 좌창은 실내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로, 주로 독창으로 부르는데, 민요에 비하여 긴 가사를 노래한다. 잡가는 각 절이 반복되는 형식이나, 그 때 마다 변하는 노랫말에 따라 곡조가 변화되기도 한다. 대부분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후렴이 없는 변형유절형식의 노래이다.
    반면에 입창으로 주로 부르는 노래는 경기지방과 서도지방의 산타령, 남도지방의 선소리등인데, 이 노래들은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하며, 독창으로 메기고, 함께 받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메기는 부분 뿐만 아니라 받는 부분의 노래도 사설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입창은 통절형식의 노래라 할 수 있으며, 일부 악곡의 경우는 변형유절형식에 가까운 악곡도 있다. 입창은 여러 곡의 노래를 달아 부르는데, 주로 느린 노래를 먼저 부르고, 차츰 빠른 노래를 이어 부른다.

    ② 기악곡의 형식

    ♣ 부분 형식
    대부분의 국악곡은 물레에서 실을 자아내는 듯한 '무한 발전 선율'에 의하여 악곡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대비와 대조를 중시하는 서양음악과는 다른 구조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몇몇 악곡에서는 반복의 원리를 이용하여 악곡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꾀하는 구조가 발견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몇 가지 형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환입 형식(도드리형식)>
    환입(還入)형식이란 서양의 다 카포(Da capo)와 같은 것으로 악곡의 앞부분을 뒤에서 반복하는 것의 일종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첫 부분을 변주하여 결국 a-b-c-b의 구조를 지니게 되는데, c에 해당하는 부분을 '환두(換頭)'라 한다. 본래 <보허자>의 형식인 이 환입형식은 현행의 <관악 보허자>에서도 발견되는데, 특히 3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에서는 A(a-b), A'(c-b),A"(d-b)의 구조를 보인다.

    <반복형식>
    <수제천>과 같은 악곡은 4장(章)으로 구성되는데, 1-3장이 조금씩 변형 되면서 반복된다.즉 전 4장 가운데 1-2장은 각 장의 첫 부분만 다르고 뒷부분은 같으며, 제3장은 제2장의 전체적인 변형이다. 이와 같은 <수제천>의 형식을 문자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A

    A'

    A"

    B



    ♣ 모음곡 형식
    국악의 중요한 연주곡목인 <영산회상>계통의 악곡이나 산조 등은 여러 개의 악장(樂章)이모여 큰 규모의 한 악곡을 이룬다. 상영산-중영산-세영산-가락덜이-삼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군악와 9곡으로 이루어진 <현악 영산회상>이나, 진양조-중모리-풍중모리-자진모리 등으로 이루어진 산조는 첫 곡이 매우 느리게 시작하여 점차로 한배(tempo)가 빨라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악곡에서도 발견되는데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 <수심가와 엮음수심가>, <육자배기와 자진육자배기>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느린곡을 먼저 연주하고, 빠른 곡을 뒤에 붙이는 것이 국악의 보편적인 악장 구조이다.
    이 점은 서양의 음악이 각 악장간의 대비와 균형을 통하여 형식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꾀하는데 비하여, 우리 전통음악은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에 의하여 악흥을 고조시키는 것을 악곡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서양의 문화가 '기존의 것과 다른,새로운 것'에 가치를 두고, 변화해 온 것임에 비하여 ,동양의 문화는 '기존의 것과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 서서히 변모해 은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즉 국악의 악장 구성 원리는 '멋과 흥의 점층'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 ※ 국악기

    우리나라에는 가야금 거문고, 피리, 대금, 해금 등 총 60여종에 이르는 악기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이들 악기들은 저마다 고유한 연원과 발생, 그리고 이동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독특하고 강한 개성을 발휘하는 이 악기들은 성악과 함께 한국 전통음악의 큰 줄기가 되는 기악곡 형식의 그 근본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사용되고 있는 악기는 매우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전통음악에 화려하고 풍부한 음악적 개성을 부여하여 독창성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한국음악을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전래하는 국악기들의 발생과 이동경로에 상관없이 이들 국악기들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면서 한국적 문화풍토에서 숙성하게 되고 결국 각종의 한국음악에서 한국음악적인 음악기법과 표현을 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라서 우리나라의 악기에 대한 고찰과 접근은 우리나라 음악이 지닌 독창성과 예술성 그리고 오랜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음악인 국악의우수성과 세계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민족문화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고양시키는 데까지 승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악기들은 상대적으로 서양악기들에 비하여 현대화가 늦어진 점과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잘아는 이가 별로 없고 매우 오래된 고대악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에 서 있는 우리나라 민족음악의 올바른 수립을 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국악의 문화환경이 극복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악기들의 현대적, 민족문화적 개념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글에서는 국악기의 종류 및 분류방법, 특징, 편성법 등에 관하여 일반적(개론적)인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일선교사 및 학생들의 국악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아울러 전해오는 악기들 중 현재 쓰이고 있는 악기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비교적 실고 간단한 해설을 덧붙여 학교현장에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악기의 종류 및 분류방법 국악기의 특징 국악기의 편성법
    [ 국악기의 종류 및 분류방법 ]
    ① 종 류
    우리나라 음악에 쓰이는 악기들 중에는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고유악기로부터 중국과 서역 여러 지방에서 수입된 악기에 이르기까지 그 수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악기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악지)』, 『고려사(악지)』, 『세종실록(오례의)』,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등이 있는데 이들 문헌에는 악기명칭만 나열된 경우가 있어서 그 악기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삼국사기 악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악기 이름이 일부 소개되어 있고, 『고려사악지』에는 30종의 악기, 『세종실로 오례의』에는 54종, 조선 전기의 음악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에 있다. 또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한국악기대관』이 64종, 『국악총론(장사훈 저)』이 62종의 악기를 각각 다루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 취급하고 있는 악기들은 대개 60여종을 넘는데 이중에는 악기라기보다는 한날 의물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고 또 안쓴 지 이미 오래된 악기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또 쓰이더라도 문묘제례악과 같은 음악의 편성에 포함되기만 하지 제대로 연주되지 못하는 악기들이 상당수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악기들 20여종을 제외하면 약 40여종의 악기가 오늘날까지 전하는 악기의 총숫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실제로 『한국예술총람 자료편-악기(성경린 저)』에서는 37종, 『국악개론(장사훈, 한만영 공저)』에서는 44종의 악기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 『국악개론』에서 다룬 악기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악 학 궤 범
    편종, 특종, 편경, 특경, 건고, 삭고, 응고, 뇌고, 영고, 노고, 뇌도, 영도, 노도, 도, 절고, 진고, 축, 어, 관(管), 약, 화(和), 생(笙), 우, 소, 적, 부, 훈, 지, 금, 슬, 둑, 정(旅), 휘, 조촉, 순, 탁(鑛), 요, 탁(驛), 응, 아, 상, 독(灌), 약, 적, 간, 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상 46종

    <당악기>
    방향, 박, 교방고, 월금, 장구, 당비파, 해금, 아쟁, 대쟁, 당적, 당피리, 퉁소, 태평소 . . . . . . . 이상 13종

    <향악기>
    거문고, 향비파, 가야금, 대금, 소관자, 초적, 향피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상 7종

    총 66종

    ♣ 증보문헌비고
    <금 부>
    편종, 특종, 요, 순, 탁(譯), 탁(鑛), 방향, 향발, 동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9종

    <석 부>
    경(편경)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종

    ② 분류방법

    우리나라의 국악기를 분류하는 방법은 크게 첫째, 제작재료에 의한 분류, 둘째, 음악의 계통에 의한 분류, 셋째, 연주법에 의한 분류, 넷째, 물체진동원리에 의한 분류의 4가지가 있다.
    이 분류법 중 첫째와 둘째방법은 전통적인 분류방법에 들고 셋째와 넷째의 방법은 서양음악또는 민족음악학계에서 쓰는 분류방법에 해당한다.

    ♣ 제작재료에 의한 분류방법
    『증보문헌비고』에서 보여주고 있는 악기 분류방법으로서 악기를 이루고 있는 재료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분류하였다.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龍), 토(土), 혁(革), 목(木)의 8가지 재료별로 나누는 것이다. 이 8가지 재료를 지칭하는 '팔음(八音)'이라는 말은 중국 고대 순임금때부터 사용된 말로서 쇠,돌,실,대나무 등의 이 8가지 재료를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인 음양오행과 건곤이감 등의 팔괘(八卦)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먼저 이러한 8음에 의하여 악기를 분류하고 또 그것을 아부, 속부로 세분하였는데 여기에서 아부는 예를 들면 금, 슬과 같이 제례음악에 쓰이는 아악기를 말하고 속부는 거문고, 가야금 같이 기타의 궁중음악인 향악과 당악에 쓰이는 향악기, 당악기를 지칭한 것이다.

    ♣ 음악의 계통에 의한 분류방법
    이 방법은 조선조 성종때 편찬된 『악학궤범』에서 시도된 분류방법으로 국악기를 아부(雅部), 당부(唐部), 향부(鄕部)로 각각 나눈 것이다. 여기에서 '아부악기'란 중국 고대에서 발생한 악기로서 고려 예종 때 송나라로부터 수입한 '대성아악'(중국의 제례음악)에 쓰이는 악기 일체를 말한다. 또 '당부악기'란 비단 당나라에서 비롯된 악기뿐만이 아니라 중국 중세의 속악기와 서역지방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수입된 악기를 일컫는 말이며, '향부악기'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모든 악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부악기에는 편종, 편경 등, 당부악기에는 장구, 해금 등, 향부악기에는 거문고, 가야금 등이 해당하는 것이다.

    ♣ 연주법에 의한 분류
    서양음악에 있어서는 악기를 그 음악상의 요소에 따라 선율악기, 화성악기, 절주악기 등으로 분류한 바 있는데 근세에 이르러서는 특히 악기의 음향학상 또는 연주법상 목적으로 하는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악기를 이 방법에 의하여 분류한다면 대금,피리 등의 악기는 관악기로, 해금 가야금 등은 현악기로,장구,편경 등은 타악기로 각각 구분된다.

    ♣ 물체, 진동원리에 의한 분류방법
    20세기에 들어와서 시도된 새로운 분류방법으로 북종류의 악기를 피명악기(皮鳴樂器) 또는 막명악기(膜嗚樂器, membrane phones)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라틴어로 '가죽'이라는 단어는 membranum인데 이 막명악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붙이게 된 명칭이다. 그리고 쇠, 돌, 나무, 흙으로 만든 타악기들은 체명악기(體鳴樂器,Idio phones), 줄을 울려 소리내는 악기들은 현명악기(績鳴樂器, Chordo phones), 대부분의 관악기들은 공명악기(共鳴樂器, Aero phones)로 각각 분류된다. 또 최근에는 전기를 이용한 악기들을 전명악기(電嗚樂諸), Electro phones)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악기분류방법은 민족음악학자 커트 작스(Curt Sachs)와 호른보스텔(E.M.von Hombostel)에 의하여 확런되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방법에 해당한다.
    또 이외에도 기본음고가 黃='C인 악기와 黃='E♭인 악기로 분류하는 방법, 같은 관악기라도 가로부는 악기(횡취)냐, 세로부는 악기(종취)냐, 또 서(리드)가 흩서(단황)냐, 겹서(복황)냐에 따라 세분할 수가 있다. 타악기는 일정한 음률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유율(有律),무율(無律)로 나누고 현악기들은 어떤 방법으로 현을 울리는가에 따라 찰현, 발현, 타현으로, 관악기는 고음, 중음, 저음, 목관, 금관, 죽관 등으로 세분될 수 있다.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叢 = C인 악기 : 편종, 편경, 당피리 등
      黃 = Eb인 악기 : 대금, 향피리, 단소 등

    ② 종취악기 : 단소, 퉁소, 새납(태평소) 등
      정취악기 : 대금, 소금, 지 등

    ③ 단황악기 : 생황 등
      복황악기 피리, 새납(태평소)

    ④ 유율타악기 : 편종, 편경, 운라 등
      무율타악기 바라(자바라), 징, 장구 등

    ⑤ 찰현약기 : 아쟁, 해금 등
      발현악기 : 거문고, 가야금 등
      타현악기 : 양금 등

    ⑥ 고음악기 : 소금, 단소 등
      중음악기 ' 대금, 피리 등
      저음악기 : 아쟁, 거문고 등

    ⑦ 목관악기 : 새납(태평소) 등
      금관악기 : 나발 등
      죽관악기 : 대금, 소금 등
    [ 국악기의 특징 ]
    ① 음 색
    국악기의 음색은 서양악기의 그것에 비하여 대체로 어둡고, 둔탁하며 애처롭다고 느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악기 음색에 대한 이러한 인상(印象)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라고하는 큰 문화적 차원에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국악기중 관악기들은 대부분 대나무로 만든다. 그리고 현악기들의 줄의 재질은 명주실로 만들어져 있다. 즉, 식물성 질감으로 된 악기가 대부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악기의 재료로 식물성 질감을 선호하게 된 한국인들의 귀와 그 심정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현악기 중에 양금이라는 악기는 금속성의 줄로 된 악기로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는데 고 장사훈박사가 이 양금이 아직 완전히 한국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한 점을 보아 아직도 이러한 금속성의 질감으로 된 악기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8음(八音)중에서 사부(絲部), 죽부(竹部), 혁부(革部)의 악기들이 우리악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양악기의 재료는 쇠붙이(금속성)위주인 데 비하여 국악기의 재료는 자연물(주로 식물)위주가 된다. 서양악기의 차디찬 금속성이 냉정과 절도와 논리와 지성을 낳았다면 , 우리 국악기의 따뜻한 목질감은 온정과 화평과 서정과 감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음악의 그것이 논리의 음악을 키웠다면 우리의 그것은 정감의 음악을 키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나무나 명주실로 된 우리 국악기들은 기후 즉, 습도나 온도가 달라짐에 따라 매우민감하게 변화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간혹 비과학적이라고 지적받기도 하지만 국악기는 기후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신체와 흡사한 요소를 지닌 것이다. 그만큼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악기의 음색이 서양악기의 음색에 비해 어둡고 애처롬다고만 여겨왔는데이러한 문화적 배경속에서 형성된 국악기의 독특한 음색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음악적 요구에 따라 더 맑고 곱고 깨끗하고 화려한 음색을 얻어내기 위한 악기개량작업도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② 철학적 배경 - 음양오행적 우주관/ 상징성
    악기의 재료 8가지 즉,8음(凡音)은 건, 곤, 이, 감, 태, 진, 간, 손의 8괘(卦)로 해석된다. 그리고 국악기가 내는 12율(律)은 12간지와 12달(月)로 푼다. 또 현악기의 몸통부분 중 위가 등근것은 하늘을,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악기배치에 있어서는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 빛깔을 한 축을 동쪽에 두고 서쪽을 상징하는 하얀 색깔의 어는 서쪽에 두고 연주한다. 축은 시작의 의미, 어는 끝의 의미가 있다. 또 군대음악에서 북은 '전진'의 의미, 징은 '후퇴'의 의미가 있다.
    그 음악적 특성이 우주적인 생리를 닮았다고 하는 점은 우리음악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악기의 발생, 쓰임, 구조 그리고 그 의미도 모두 이러한 음양오행적 우주관에 입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물놀이의 징, 북, 꽹과리, 장구를 각각 바람, 구름, 벼락, 비 즉 『풍운뇌우』로 해석하는 것이나,불가에서 쓰는 사물(법고, 운판, 목어, 범종)에 중생 및 세상에 온갖 금수와 어족들을 구도하기 위한 깊은 의도가 담겨져 있듯이 우리 국악기들이 지닌 철학적인 배경과 그 상징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③ 외래악기의 한국화
    순수하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향악기는 대금, 중금, 소금, 가야금, 거문고 등 불과 수개에 지나지 않고 지금까지 나열된 60여종의 국악기 대부분이 외래악기에 해당한다.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중국이나 서역계통에서 들어온 많은 수의 악기들은 마치 <보허자>라는 송나라의 음악이 한국화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처럼 무수한 변화에 변화를 거쳐 한국음악을 연주하기에 가장 적당한 악기로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음악과 만나게 되는 수준을 뛰어넘어 오히려 한국음악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따라서 똑같은 장구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연주하는 장구의 소리와 우리 음악에서의 장구소리는 천양지차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외래악기의 토착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양금이라는 악기가 조선조 후기에 청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지금은 <영산회상>등 줄풍류음악에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개성악기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외래악기 한국화의 전형적인 예가 되겠다. 앞으로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거울삼아 외래악기를 어떻게 하면 한국음악의 독특한 개성을 형성하는 데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④ 유동적인 연주기법
    우리음악에는 서양음악과 달리 음을 흔들거나 흘려 내리거나, 꺾거나, 밀어 올리는 기법등이 많이 나온다. 우리 국악기들은 바로 이러한 주법을 가진 주체로서 그 구조와 제도가 이러한 제반의 한국음악적인 기교와 주법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양음악의 경우는 한개의 지공에서 여러 음 즉,조금이라도 높거나 낮은 음이 나서는 별로 좋은 악기라고 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의 지공을 막으면 언제 어디서나 정확히 예정되어 있는 한개의 음만이 소리나야 좋은 악기로 대접받는다. 그렇지만 우리 악기의 경우는 같은 지공을 잡고서도 악기의 각도나 부는 방법에 따라 여러 음이 날 수 있다. 또 음을 흘려 내리거나 밀어올리거나 또는 매우 심하게 흔들어 냄으로써 한 지공에서 여러 개의 음이 나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국악기가 서양악기에 비하여 비과학적이라고 지적 받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인데 이는 오히려 한국음악의 독특한 연주기법을 창출하는 근본이 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해금은 물론 피리와 같은 관악기,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 그리고 장구와 같은 타악기에 이르기까지 연주방법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악기소리의 편차는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변화중에 있어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국악의 요소를 이 국악기가 제공하여 주고 있는 셈이다.
    [ 국악기의 편성법 ]
    ① 관현악 편성

    ♣ 관현악 + 편종, 편경
    보통의 관현악 편성에는 편종, 편경이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편종, 편경이 포함되는 편성일 때 이를 특별히 '관현종경합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약하여 '합악(合樂)'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이러한 용어를 사용치 않는다. 그러나 관현악 편성의 개념 안에서 편종, 편경이 포함되는가 안되는가에 따라 음량면이나 음악의 성격상 구분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관현악에 편종, 편경은 물론 노래와 춤까지 포함되는 대규모의 악(樂), 가(歌), 무(舞) 일체적(一體的)인 편성도 있을 수 있다.

    ♣ 관현악 편성
    모든 관악기와 현악기 그리고 타악기들이 편성되는 음악을 '관현악' 또는 '관현합주'라고 하는데 때로는 작은 규모의 줄풍류음악에도 관, 현, 타악기들이 각각 1개씩 편성되므로 관현합주의개념이 성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통념상 대규모의 관현합주는 관현악 또는 관현합주 편성이라고 하고 작은 규모의 관현합주는 통상 줄풍류 편성 또는 세악(細樂) 편성이라 하는 것이다.


    ② 관현합주 편성
    이는 관악기가 위주가 되는 악기편성이나 그링다고 전혀 현악기나 타악기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이 편성은 관악기, 타악기가 위주가 되는 음악으로서 관례상 지속음을 내어 관악기 취급을 받는 해금, 아쟁 등과 같은 현악기도 포함한다.
    보통 피리, 대금, 해금, 아쟁, 장구, 좌고, 소금 등이 편성된다.


    ③ 줄풍류 편성
    현악기, 특히 거문고가 중심이 되는 음악을 '줄풍류 음악'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 편성은 현악기들만의 합주편성을 의미하는 '현악합주'와는 구분이 된다.
    또 이와 혼용해서 쓸 수 있는 '세악편성'과도 구분이 된다. 왜냐하면 통념상 '줄풍류'가 곧 '세악편성'이다 라고 여기는 관습이 있어 왔지만 이 세악편성의 정확한 의미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음악, 예를 들면 2~3개의 악기편성에서부터 8~9개 악기편성인 줄풍류 편성까지를 두루 포함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줄풍류보다도 세악편성이 더 넓게 쓰이는 편성법이며 용어인 것이다. 줄풍류에는 보통 거문고,가야금, 세피리, 대금, 해금, 장구, 양금, 단소등의 악기가 각각 하나씩 편성되며 때에 따라 악기종류가 가감되기도 한다.


    ④ 세악 편성
    세악(側梁)의 개념은 사실 상대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2~3개의 병주편성 에서부터 8~9개의 줄풍류편성까지 모두 세악편성이라고 하니까 이는 곧 수개의 악기들이 편성되는 규모가 작은 실내악(방중세악(房中細樂)) 편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과거 대취타 연주시 타악기 위주편성의 악대(전부고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음량이 작은 관악기 위주의 악대(후부고취)를 음량이 작다는 뜻에서 '세악'이라 부르고 이 악대의 연주자를 세악수라 했던일이 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세악이 현재에는 취타대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고 그 의미만 즉, 상대적으로 음량이 작은 악기편성의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고 하겠다.


    ⑤ 대풍류 편성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편성이 줄풍류편성인 것처럼 관악기 특히 피리가 중심이 되는 악기편성을 말한다. 즉,향피리 중심의 풍류음악을 지칭하는 말로서 여기에서 풍류는 '즐기는 음악', 혹은 '감상하는 음악'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결국 향피리가 중심이 되는 감상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삼현육각 편성과 같이 피리 2, 대금(젓대) 1, 해금 1, 장구 1, 좌고 1로 편성된다.
    대풍류로 연주되는 음악의 일부는 감상용 음악으로뿐만이 아니라 무용반주에 쓰이기도 한다.


    ⑥ 삼현육각
    대풍류와 편성은 동일하지만 이 악기편성은 주로 무용 반주음악의 악기편성을 지칭한다 대풍류가 감상용 음악이라면 삼현육각은 무용반주용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삼현육각 편성인 <관악영산회상(표정만방지곡)>은 감상용으로 연주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용반주에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슷한 악기편성의 음악인 대풍류와 삼현육각의 음악들이 그 편성이나 용도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무용반주와 감상의 영역을 서로 넘나들면서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현육각(三結六角)이란 용어는 '3개의 현악기와 6개의 관악기'라는 뜻을 포함하고있는데 사실 이 편성에 현악기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이 궁금해진다. 물론 과거에는 완전하게 삼현육각편성으로 쓰여졌는지 모르지만 현재에는 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구 1,북 1과 같이 관악기, 타악기들로만 편성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현악기가 제외된 삼현육각의 편성은 조선조 후기 단원 김흥도의 『무악도(舞樂圖)』에 나타나고 있는데 과거 현악기가 포함되는 삼현육각이 비교적 운치가 더 있는 노래반주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추론해볼 수 있는지 몰라도 비교적 간단한 편성으로도 큰 음량을 요하는 무용반주음악에 현악기가 제외된 이 삼현육각이 많이 쓰이면서 본래의 삼현육각의 개념이 관악기, 타악기 위주의 합주편성이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⑦ 병주
    2~3개의 악기를 같이 연주할 때 '병주'라고 한다. 예를 들면 생황과 단소의 2중주를 '생소병주'라고 하는 것이다.


    ⑧ 병창
    한 사람 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병창이라 한다.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하면 가야금병창,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면 거문고병창이라 하는 것이다. 병창의 반주악기로는 장구가 편성된다.


    ⑨ 삼현삼죽
    이것은 악기편성이라기보다는 흔히 말하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악기의 명칭으로서 많이쓰인다. 즉,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관악기 대금, 중금, 소금을 묶어 '삼죽(三竹)'이라 하고 대표적인 현악기 가야금, 거문고, 비파(오현)를 일러 삼현(三績)이라 부르고 이 둘을 합하여 '삼현삼죽'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표적인 악기들이면서 또한 대표적인 악기편성일 가능성도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현』중의 비파는 5현의 향비파를 말하는데 이는 훗날 우리나라에 들어온 4현의 당비파와 구분하여 향비파라고 굳어진 것이다.


    ⑩ 대취타 편성
    취타는 원래 행진악대 편성을 말한다. 즉, 관악기와 타악기가 위주가 되는 음량이 큰 취타대음악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취타편성에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가 비교적 큰규모의 악대편성을 한 대취타로서 궁중에서 각종의식이나 능행(陵幸) 그리고 군대의 개선과 행진 등에 쓰였으며 또 하나는 작은 규또의 악대편성을 한 소취타로서 지방 관청에서 쓰였다.
    대취타 편성은 징 1, 나각 5, 나발 5, 바라 5, 새납 5, 장구 5, 피리 5, 해금 5 등 총 50여명 내외의 악기가 편성되는데 비하여 소취타는 이 대취타 편성악기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취타 연주편성을 보면 나발 1, 나각 1, 새납 2, 용고 1, 바라 1, 징 1, 등채(지휘자) 1로서 10명 남짓에 불과하다. 음악은 과거의 대취타 음악을 이어오고 있는지 몰라도 규모는 대취타라는 의미를 무색케 하고 있다고 하겠다.


    ⑪ 취타편성
    행진음악으로서의 취타음악을 실내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바꾸고 그에 따라 현악기가 더 포함된 관현악 편성을 한 것이 이 취타편성이다. 일명 <만파정식지곡>이라 부르는 이 취타음악은 분명 <대취타>가 가진 12박 장단을 가졌으며 선율도 <대취타>의 새납선율을 변주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취타라는 행진악대 음악편성이 그 본래의 의미외에 관현악으로 즉, 감상용음악으로 변화된것에 유의해야 한다. 힌행 취타(만파정식지곡)의 편성은 향피리,대금, 소금, 해금, 아쟁, 장구, 좌고, 가야금, 거문고 등이다.


    ⑫ 풍물놀이 편성
    지방에 따라 다소의 가감은 있지만 새납,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법고 등이 이 풍물놀이편성이다. 이들 각 악기의 숫자를 늘리고 줄이는 것은 지역마다 다르나 보통 꽹과리, 장구, 북, 소고 등의 악기는 2~3이상이 편성된다.


    ♣ 경기 안성지역 풍물패 편성
    - 악기 : 새납, 꽹과리(상쇠, 부쇠, 종쇠), 징, 장구(수장구, 부장구), 북, 소고
    - 기타 : 농기, 영기, 무동, 새미(춤), 탈광대, 양반 등

    ♣ 정읍지역 풍물패 편성
    - 악기 : 새납, 나발, 팽과리(상쇠, 부쇠, 종쇠), 징, 장구(수장구, 부장구), 북, 소고(수법구 - 8 법구)
    - 기타 : 영기, 농기, 대포수, 중, 무동, 양반, 왜장녀 등

    ♣ 진주 삼천포지역 풍물패 편성
    - 악기 : 꽹과리(상쇠, 부쇠), 징, 장구, 북, 소고
    - 기타 : 농기, 집사, 포수, 왜장녀, 무동, 양반 등

    ⑬ 제례음악 편성
    제례음악은 보통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의 2개의 악대편성으로 나눈다. 등가편성은 보통노래와 현악기가 중심이고 헌가편성은 관악기와 타악기가 중심이다.

    ♣ 문묘제례악 악기편성
    - 등가 : 편종, 편경, 특종, 특경, 금, 슬, 소, 훈, 지, 약, 적, 절고, 부, 축, 어, 박
    - 헌가 편종, 편경, 훈, 지, 약, 적, 노고, 노도, 진고, 부, 축, 어, 박

    ♣ 종묘제례악 악기편성
    - 등가 : 편종, 편경, 박, 아쟁, 대금, 당피리, 땅향, 절고, 장구, 축, 어
    - 헌가 : 편종, 편경, 박, 대금, 새납, 당피리, 해금, 방향, 진고, 장구, 축, 징, 어


    ⑭ 기타 편성

    ♣ 사물놀이 편성
    꽹과리, 징, 장구, 북의 4개 악기가 기본편성이나 짝드름 연주시에는 꽹과리가 2개(암, 수꽹과리)가 쓰일 수 있으며 또 설장구 연주를 할때에는 장구만 4대가 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물놀이 악기외에 새납이 첨가될 때도 있다.

    ♣ 무악 편성
    무악편성도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개 새납, 피리, 대금, 해금, 제금(바라), 징, 꽹과리 등이 쓰인다.

    ♣ 시나위 편성
    기본악기편성은 향피리 1, 대금 1, 해금 1, 장구 1이지만 무대화되면서 여기에 징, 가야금,거문고, 아쟁 등이 첨가된 악기편성이 나타나고 있다.

    ♣ 가곡반주 편성
    가곡반주 편성은 <영산회상>과 같은 줄풍류 편성으로 세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장구 등이 포함된다.

    ♣ 시조반주 편성
    시조반주 편성은 일정하지 않아서 대금 1, 피리 1, 단소 1, 장구 1 등이 편성될 때도 있고 또 단소 1 혹은 장구 1만 편성되거나 아예 반주 없이 무릎장단만으로 노래할 때도 있다.
  • [ 상고시대 ]
    상고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왕권국가를 형성하기 전의 대략 3세기 이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관한 음악관련 자료는 매우 희소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음악내용은 알 수없다. 다만 상고시대는 수렵채취와 농사를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안전한 생활과 식량의 풍요를 기원하는 '사냥굿'이나 '농사굿'이 있었을 것이고, 그 굿은 현재의 무속 의식과 같이 음악과 춤으로 제신(祭神)하는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농사굿의 흔적은 당대의 상황을 기술해 놓은 중국측 사료에서 몇 가지 확인된다. 중국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에는 동이(東夷) 사람들이 농사절기에 맞추어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삼한 뿐만 아니라 북쪽의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 예(濊)에서도 각각 정월에 벌이는 마지를(영고, 迎鼓)과 10월에 벌이는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으로 보아 '나라 전체 사람들이 크게 모여 며칠을 계속해서 술 마시고 밥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國中大會 連日 飮食歌舞)' 국가 규모의 축제는 한반도 전체의 일반적인 문화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음악과 춤이 전승되었으리라고 본다.
    한편, 역시 중국의 『삼국지』에는 한반도의 남쪽 '변진(弁辰)에 중국의 슬(瑟)같이 옆으로 뉘어 타는 현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축(鏡)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이 악기에 대한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악기의 모양이나 쓰임새, 변진 사람들이 불렀을 악기 이름 등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거문고' '가얏고'에 비추어 이 악기가 일종의 '고'라 불렸을 것이며, 이것이 거문고, 가야금이 나오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연주되던 현악기의 가장 오래된 원류라 추측하기도 한다.
    [ 삼국시대 ]
    삼국시대라면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이전 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외국과의 정치,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서역의 음악이 전래하였으며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함으로써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① 고구려
    고구려의 음악문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에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紀)』, 『수서(隋書)』 등의 문헌이 있다.
    고구려의 음악문화를 대표하는 악기는 거문고이다. 거문고는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진(晋)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당시 고위관직에 있던 왕산악(王山岳)이 악기의 외형은 그대로 두고 구조를 개조하여 새 악기를 만든 후, 이 악기를 위한 일백곡을 지어 연주를하니 갑자기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 붙였는데 훗날 '학'자가 빠지고 '현금(玄琴)', 즉 거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고구려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거문고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독주 악기로,또는 춤 반주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우리음악사에 중요한 맥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음악은 여러 고분 벽화에 그 편린들이 남아 있다. 황해도 안악 제3호분 (357년 축조, 중국에서 귀순해 온 동수(冬壽) 장군의 묘)에는 고분의 전실(前室)에 입고(立鼓), 소, 노래로 편성된 악대가 묘사되어 있고,회랑(回廊)에는 6?70명의 행렬도 중에 연주자4명이 북, 소, 각(角, 혹은 각) 요를 연주하는 것을 보여주며, .또 후실(後室)에는 완함(玩咸), 종적(縱笛),거문고로 보이는 현악기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악도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분벽화의 연주도는 중국 한계(漢系)의 음악편성과 매우 흡사하여 4세기 경에는 중국의 음악이 고구려에 소개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옛 고려의 영토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6세기 초반의 무용총(舞踊塚) 벽화에는 한 연주자가 17괘 4현의 현악기를 술대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여 주목된다. 이 현악기는 바로 16괘 6현으로 된 현행 거문고의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이밖에도 무용총에는 다섯사람의 고구려 무용수들이 음악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연회음악의 일면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평남 강서군의 강서대묘와 집안현 17호분, 평남 용강군의 대안리 고분,강서군의 약수리무덤, 대동군의 팔청리 무덤에 음악과 오락의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음악과 춤과 관련된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고분벽화의 내용 중에서는 묘주인공의 생전 생활을 묘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죽은 이의 영혼천도를 기원하기 위해 상상으로 그린 선인(仙人像)도 있기 때문에 그 내용 전체를 음악사료로 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구려의 음악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료에 기록된 것으로도 그 윤곽이 드러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본에 군후(軍候, 일본식 발음은 궁꼬, 거문고로 추측됨)와 횡적(橫笛) 막목(莫目 :일본식 발음 마꾸모, 관악기의 일종으로 추측)으로 춤을 반주하는 음악을 전해주었다. 이러한 편성은 일본에 전해진 백제 것과 같은 것으로 일본에서는 이를 백제국 풍속무(百濟國 風俗舞)라 불렀다. 이로 보아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악의 내용도 역시 민속춤과 관현합주였을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즉 『고려사』 악지에 고구려의 속악으로 기록된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 <명주」溟州)> 등과 같은 지방의 민속음악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또,중국 문헌인 『수서(隋書)』 동이전에 의하면,고구려에서는 오현금?쟁?피리 횡취(橫吹)-소-고(鼓) 등이 연주되었다. 이는 일본에 전해진 군후, 횡적, 막목,춤의 편성과는 달리 중국 전래의 외래악기가 포함된 것으로 고구려 음악의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중 오현금(오현비파)과 피리는 서역악기로 서역음악이 중국의 북조,특히 북제(北齋)와 북주(北周)를 거쳐 고구려에 수용된 것인데 이는 고구려 전기에 있었던 류트(Lute)류의 악기 완함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서역에서 들어온 관악기 피리가 편성에 추가되므로써 풍부한 음향을 가진 새로운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구려음악 군후, 막목, 횡적과 춤의 민속음악보다 더욱 세련된 음악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국제적인 음악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는 고구려 음악이 대대적인 규모로 중국에서 연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서』와 『구당서(舊唐書)』 등에는 중국 수(隋)와 당(唐)나라 때 중국 궁중에서 연주되던 각 나라의 음악을 7부기(七部伎)?9부기?10부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고구려악이 포함되었다 7부기, 9부기란 중국 궁중에 소속된 여러나라의 악대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중국 고유의 음악을 포함하여 당시 중국에 새로운 문화를 전해준 중앙 아시아, 서아시아 7개국, 9개국, 10개국의 민족음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의 하나였던 고려기(高句麗樂)의 악기는 앞서 살핀 6종의 악기 외에 수공후?비파 같은 새로운 서역악기가 추가되었고, 여기에 오직 고려기와 서량기(西凉伎)에만 쓰였던 제고와 담고 등의 타악기가 추가되어 14종의 편성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이 14종의 악기편성은 주로 서량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당시 고구려가 중국 북조와의 긴밀한 교류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선진화된 음악문화를 형성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② 백제
    백제의 음악문화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드물어 윤곽을 살피는 일이 더욱 어렵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일본후기』에 군후, 막목. 횡적과 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앞서 살핀 고구려의 것과 같은 악기편성이다. 이 중 군후(거문고)는 일본에서 백제금(百濟琴, 구다라 고토;クダラコト)으로 불렸는데, 이는 고구려의 거문고가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야의 현악기 가야금이 신라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라금(新羅琴;시라기고도)로 지칭되는 것과 같은 예이다) 일본에 전해진 백제악은 백제의 풍속무와 민속음악으로,『고려사』 악지에 백제악으로 소개된 <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정읍(井邑)>?<방등산(方等山)>?<지리산(智異山)> 등과 같은 음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서』의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 쟁?우(芋)?지?적(笛)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한데, 이는 중국북방과 교류하였던 고구려악이 서량악과 비슷한 음악문화를 지녔던 것과 달리 백제가 중국남조와 교류하면서 그 음악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수서』에 보이는 백제의 7가지 악기는 일본에 전한 '백제악 풍속무와 민속음악'보다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7부기?9부기?10부기에 포함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인 미마지(未摩之)가 612년 일본에 귀화하면서 중국 남조의 오(吳)나라에서 배운 가면극의 일종인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했다. 미마지가 전한 기악무는 교훈적인 불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이 기악무가 우리나라에서 전승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일본에서 전승된 기악무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양주산대놀이>와 비슷한 줄거리와 유사한 구성을 지닌 것으로 분석된 바 있다.
    이밖에도 1993년 10월에 새로 발굴된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 香爐)에는 5인의 주악상이 묘사되어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 5인의 주악상은 세로로 부는 장적(長笛)과 소, 북, 금(琴),완함을 연주하고 있는데 백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굴된 이 금동향로의 주악상은 이것이 백제시대의 실재음악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지 앞으로 백제음악사를 살피는 장에서 지속적인 관심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③ 가야
    가야금의 원조 나라인 가야의 음악문화는 『삼국사기』의 가야금에 관한 기록에 일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야금은 가야(伽倻)의 가실왕(伽實王)이 중국 수?당의 쟁(箏)을 본따서 만들었고 가야국의 성열현(省熱懸)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사자기>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보기(寶技)>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 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륵은 가야가 멸망하게 되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투항(진흥왕 12년, 551)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 지금의 忠州)에 머물게 하고 신라 사람 대내마(大奈麻) 법지(法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어 노래와 가야금, 춤을 배우도록 조치함으로써 가야금 음악의 신라 전승을 가능케 하였다. 그런데 우륵에게 음악을 배운 신라제자들은 우륵의 12곡을 배운 뒤 "가락이 복잡하고 아정(雅正)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를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은 제자들이 수정, 보완한 음악을 듣고나서 처음에는 언짢게 여겼으나 비로소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 라는 평과 함께 제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이 음악은 훗날 신라의 대악(大樂,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었다.
    이상의 기록으로 가야금은 대략6세기 중엽에 가야에서 탄생되어 신라에서 크게 번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당시 신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가야금(현재 일본의 나라의 쇼소인(正倉院) 소장)의 모양이나,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의 가야금은 모두 양이두(羊耳頭; 풍류가야금의 아랫부분이 양의 귀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를 갖고 있어 현행의 풍류가야금의 형태가 신라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고형임을 알 수 있다.


    ④ 신라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던 신라의 음악문화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매우 소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악지 정명왕(신문왕) 9년조를 보면,당시 신라의 연향악으로 <가무(가舞)> <하신열무(下辛熱舞)> <사내무(思內舞)> <한기무(韓岐舞)> <상신열무(上辛熱舞)> <소경무(小京舞)> <미지무(美知舞)> 등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었다. 이 내용은 통일신라 때의 기록이지만 통일이전의 음악유풍을 기술한 것으로 신라의 음악문화를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이들 연향악에 사용된 금은 가야금이다. 또 그 음악은 통일전과 다를 바 없겠지만 가야금은 6세기경에 신라에 수용된 악기이므로, 지방 속악에서 유래된 우륵의 가야금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어 궁중음악이 되었듯이, 통일전의 <신열악>?<사내악>?<미지악>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가야금과 함께 연주되면서,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바로 이와 같은 금(琴)?가(歌)?무(舞)로 편성된 신라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 궁중에서 809년까지도 연주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음악은 백제나 고구려가 중국과의 교류로 새롭게 발전된 음악규모를 갖추었던 데 비해 간소찬 것이어서 중국에는 알려지지 못하였다. 신라 음악사를 살피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이다. 설립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진덕왕 5년(651)에 음성서의 관직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대개 7세기 경에 제도화된 듯하다. 신라에서는 일찌기 종묘제도를 두어 조상의 제사도 지냈고, 왕과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회도 벌였으며,또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하례(賀禮)까지 있었으므로 이러한 의식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제도화된 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해석된다.
    [ 통일신라시대 ]
    [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시대의 음악문화는 신라는 물론 신라보다 높은 수준의 음악문화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수용하고 여기에 당나라의 음악, 서역음악을 더 넓게 받아들여 통일왕국다운 음악 시대를 열어 나갔다. 더우기 이 시대에는 불교음악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삼현삼죽(가야금, 거문고, 비파, 대금, 중금, 소금) 주축을 이루는 향악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또 상류사회 지식계층에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금가(琴歌)의 문화가 맥을 이었다. 또 민간에서는 고대의 제천의식을 수반했던 국중대회의 전통이 불교와 습합된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지기도 했다.

    ① 향악과 당악
    신라 때의 당악(唐樂)을 당나라 음악으로 당 현종(742) 이후의 속악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라가 당악을 수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신라의 당악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삼국사기』 악지에 비파 즉, '당비파'와 구분하여 신라의 악기 '향비파'를 소개하고 있고,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와 같이 '향악'이라는 명칭은 '당악'의 존재를 암시한다. 또 통일신라의 향악에는 당악기(唐樂器)로 추측되는 박(拍)과 대고(大鼓)가 편성되어 있어 신라의 당악 수용을 확인 시켜 준다. 조선조의 음악문헌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보면 향악기와 당악기를 모두 사용하는 조선 초기의 악대편성에서 북과 대고가 향악과 당악 사이에 위치하여 양부의 음악이 겸용하도록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예에 비추어 통일신라의 향악에 사용된 박판?대고의 존재가 당악 전래의 가능성을 심도 높게 시사해준다.
    이밖에도 신라의 향악기인 대금(大等)?중금?소금에 중국의 악조인 '황종조(黃鍾調)'?'반섭조(盤涉調)'?'월조(越調)' 등이 포함된 점도 당악의 신라 전래를 입증해준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미술품인 탑과 부도, 범종에 여러가지 주악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문헌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공후, 세요고, 북, 횡적, 소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악기들의 실제 사용여부는 앞으로의 논증을 거쳐야 하지만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癸酉銘阿비陀三尊四面石像)이나 지증대사적조탑신(智證大師寂照塔身)에 묘사된 악기와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당악의 편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의 당악은 고대의 유풍을 그대로 간직한 일본의 당악처럼 방향?비파?쟁?공후?생?소?척팔(尺八)?피리?당적?고(鼓)의 편성이었음을추측해 볼 수 있다. 당악에 대칭되는 향악은 신라 고유의 향토 음악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악지에서 언급한 향악은 거문고?가얏고?향비파?대금?중금?소금?박?대고 등 8종의 악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같은 향악편성은 통일 이전에 가야금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것에 비하여 매우 확대된 것으로 여기에는 고구려의 악기 거문고와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과 대고등이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처럼 향악의 내용이 확대된 까닭은 그 대비가 되는 당악의 악기편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② 금가
    금가란 거문고 반주에 의한 노래, 또는 거문고 독주를 뜻한다. 일종의 방중악(房中樂)에 해당하며 조정교묘(朝廷郊廟)의 음악과는 다르다.
    삼국이 통일되자 고구려의 거문고는 신라로 전해졌지만 처음에는 천존고에 신기(神器)로 보관되었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후에 귀족출신의 음악가 옥보고(玉寶高)가 8세기 중엽 지리산으로 들어가 50년 동안이나 거문고를 익혀 30여곡의 거문고곡을 지었고, 그의 금가전통은 속명득(속命得)을 거쳐 귀금선생(貴金先生)에 전하여 이후 몇번의 단절위기를 거쳐 안장(安長)과 그의 아들로 전해진 다음부터는 금으로 업을 삼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고 한다.
    옥보고가 지은 거문고 곡명은 <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등 한문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지은 가야금곡이나 우리말 가사를 가진 사뇌와는 구분된다. 즉, 옥보고의 거문고 음악은 신라의 선율에 한시를 담은 곡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귀금과 그의 계승자들도 역시 금가를 남겼으며, 이와같은 통일신라의 거문고 음악 유산은 고려시대의 금가인 <풍입송>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③ 범패
    범패는 불교의 의식음악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3~4세기경으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일련의 불교의식음악이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월명사조(月明師條)에 보면 경덕왕때에 하늘에 해가 둘이나 떠오르는 변고가 생겨 당시 화랑이었던 월명사에게 범패를 불러 변고를 물리쳐 달라는 청을 하게되는데 이에 대하여 월명사는 '나는 범패는 모르고 향가만 할 줄 안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어 이미 8세기 경에는 범패가 신라에 유포되었음을 반증해준다. 그 후 신라의 진감선사(眞鑑禪師)는 830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경상남도 하동의 옥천사(玉泉寺, 현재의 雙鷄寺)에서 범패를 가르쳐 신라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9세기 경에 중국 산동성의 신라인촌에 머물면서 신라인들의 불교의식을 기록에 남긴 일본 원인자각대사(圓仁慈覺大師)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의 범패가 인도에서 전래된 고풍(古風), 중국에서 중국화한 당풍(唐風), 한국에서 한국화한 향풍(鄕風)의 세가지로 구분되어 있어 신라 에서의 범패 전승 양상을 확인시켜 준다.


    ④ 향악잡영오수
    신라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당대에 연행되던 놀이 다섯가지를 주제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금환(金丸)> ? <산예(산猊)> ?<월전(月顚)> ?<속독(束毒)> ?<대면(大面)> 등 다섯수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금환>은 여러 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도칠환(跳七丸)이라는 공놀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에는 물론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전래된 것이고, <산예>는 일명 <사자기(獨子技)>라고 하는 서량의 춤이며, <월전>은 중앙 아시아의 우전(于關, kothan)지역의 놀이로서 여러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면>은 일종의 가면무인 데, 채찍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북제의 대면(代面)과 유사하며, <속독>은 중앙아시아 속특(粟特, sogdiana)지방의 춤으로 현재까지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악(舞樂) <슈쿠톡구 宿德>과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서역전래의 놀이를 주제로한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오수>는 모두 외래의 놀이를 노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향악'이라 지칭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신라에 당악이 수용되면서 전래의 향악은 물론 그 이전에 소개된 외래 음악을 한데 아울러 향악이라 불렀을 가능성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 고려시대 ]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 말년(1170)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향가와 화랑의 전통, 팔관회와 연등회 등 통일신라의 유품이 강하게 전승되는 한편,중국으로부터 아악이 전래되어 향악, 당악, 아악의 전통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품이 점차 사라지고,중국에서 들어온 아악의 전통도 주변 정치상황에 기인하여 문란해졌고,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새로운 음악이 출현하였다. 고려시대의 음악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각 분야별 변천과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전기
    ♣ 관현악 + 편종, 편경
    고려 전기는 태조(太祖)부터 의종(毅宗)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아악과, 속악으로서의 당악이 수입되어 소위 아?당?향의 구분이 확립되는 시기이다.

    ♣ 아 악(雅樂)
    아악은 종묘?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치식음악이다. 아악은 금?석 ?사?죽?포?토?혁 ?목의 팔음(八音) 악기를 당상악(堂上樂 : 登歌)과 당하악(堂下樂 : 軒架)으로 구분 배치하여 율려(律呂)에 맞게 교대연주(연奏) 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악장(樂章)과 춤이 반드시 따르는 악, 가, 무 총체의 음악으로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아악은 고려 예종 11년(1116)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예종은 송과 교류하면서 휘종에게 외교사절과 음악인을 보내어 아악의 한국수용을 청하였는데, 송나라에서는 고려가 새로이 아악전통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대규모의 악기와 의물(儀物), 악보(樂譜)를 구비하여 보내준 것이다. 이때 고려에 소개된 송의 아악은 숭녕(崇寧) 4년(1105)에 송의 휘종이 새로 정비한 대성아악(大最雅樂)으로서 이전의 아악과는 몇가지 차이가 있었다. 즉 송 휘종은 황종(黃鍾)의 음높이를 새로 결정하고, 악기와 악장(樂章)에 각각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의 구분을 두었으며, 금(琴)의 종류에 1현금?3현금?5현금?7현금?9현금의 5등금(五等琴)제도를 둔 것이었다. 고려에 수용된 대성아악기는 중성?정성의 편종과 편경, 5등금과 슬 및 중성?정성의 지 ?적(笛) ?소 ?소생(巢笙) ?화생(和笙)?우생(宇笙) ?훈(塤) ?박부(搏부)?진고(晉鼓)?입고(立鼓 일명 建鼓. 건고와 비고, 응고 셋이 한 틀을 이룸)?축?어의 20종에 달하고,수량만 해도 등가악기 30점, 헌가악기 374점이라는 대규모였으며, 560개의 편종?편경의 무게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아악기가 수용된 것은 한국음악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더우기 송나라에 아악을 청하러 간 고려 사절단은 단지 아악기만을 받아 온 것이 아니라, 송나라에 머물면서 아악을 교습받고, 대성부(大晟府)에서 펴낸 악보를 받아 옴므로써 고려에서의 아악연주 전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 당 악(唐樂)
    고려시대에 당악이라 지칭된 음악은 송(宋)나라의 음악이다. 통일신라로부터 이어받은 당악의 기반 위에 11세기에는 문종(文宗)이 적극적으로 당악의 수용을 요청한 바 있고, 1114년에는 송나라의 연향악인 대성신악(大晟新樂)이 들어왔으며, 이밖에 12세기 초에는 고려의 여기(女妓)가 송나라의 명주(明州)에 가서 대무(隊舞)를 배워 귀국하였는데 이러한 당악의 유입이 고려시대 당악의 주류를 이루었다. 송나라의 악무(樂舞)가 고려에 소개되어 연행된 기록으로는 1073년 연등회에서는 교방여제자 13인이 추는 <답사행가무>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 같은 해 팔관회에서 <포구락>과 <구장기별기>가 연행된 사실, 1077년에는 궁중의 연향에서 <왕모대가무>가 각각 선보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밖에 예종 대에는 <연화대>가, 의종 대에는 <헌선도>가 연행되기도 했다. 이 춤들은 대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열을 지어 추는 대무(隊舞)의 성격을 띠었는데 이러한 당악정재(唐樂呈才)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등의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당악의 핵심을 이루는것이라 할 수 있다. 와 같은 당악정재는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좌방악(左坊樂)이라 하여 서쪽에 배치되었고이와 상반되는 향무(鄕舞), 즉 향악기 반주에 우리말 노래를 수반하는 향악정재는 우방악(右坊樂)이라 하여 동쪽에 배치되었다. 편 송사(宋詞)의 형태는 <청평악>과 같은 사(詞)와 음악합주로 춤을 반주하는 것, 춤을 추는 중간에 춤동작을 멈추고 서서 <헌천수>와 같은 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보허자>같이 무반주로 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이 사의 전통 역시 고려시대 당악의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억취소(憶吹소)> 이하 40수의 사가 실려 있는데 이중에서 <낙양춘(洛陽春)>은 중국 시인 구양수(歐陽修)의 작품이고, <하운봉(夏雲峰)> 외 7곡은 유영(柳永)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이하 40여수도 송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 향 악(鄕樂)
    고려전기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兩部樂)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고려 향악에 사용된 악기를 보면 신라의 향악과 같이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중금?소금?대고?박의 편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밖에 당악연주에 사용된 장구가 새로이 첨가되었다. 장구가 고려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당악과 향악 연주에 다같이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백제악 5곡, 신라악 5곡, 고구려악 5곡 등 삼국악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밖에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당악과 향악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전통도 역시 통일신라로부터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 전기까지 계승된 신라 사뇌의 전통이다. 균여대사(均如大師)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가사의 전구(前句)와 후구(後句)사이에 '아야'라는 차사(嗟詞)를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불교 포교를 위해 직접 창작되고 노래로 불린 사뇌가 차사 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의 민간에서는 10세기 중엽까지도 신라의 차사사뇌 양식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려 중엽에는 <정과정(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한다. <정과정>은 정서(鄭敍)의 작품으로,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곡인데, 고려말 이제현(李齋賢)에 의하여 칠언절구의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내용은 우리말 가사를 가진 조선조의 <진작(眞勺)>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악학궤범』의 <진작> 전반 가사는 전강?중강?후강?부엽으로 구분되었고, 『대악후보』에서는 일?이?삼?부(-?二?三?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삼(三)의 끝에 달린 '아으'라는 차사에서의 완전종지와 부엽 끝에서의 완전종지에 의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음악형식을 종합하면, <정과정>은 차사사뇌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신라 사뇌의 양식과 같고, 전체가 3구와 부엽으로 되 었다는 점 에서 는 전체가 4구와 후구(後句)로 된 사뇌와 다르다. 즉, <정과정>은 사뇌의 감소형(減少形)으로서 그 변모과정을 보이는 좋은예라고 하겠다. <정과정>은 고려에서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 전하였고, 『양금신보』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이 모두 <정과정> 삼기(三機)에서나왔다고 한다.


    ② 후기
    고려 후기는 신라의 차사사뇌와 화랑 신분이 거의 사라진 명종조(1171)에서 고려말(1392)까지 약 200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의 음악문화는 전기에 수입된 아악과 당악이 고려 후기의 혼란기를 통해서 점차 쇠퇴해 가는 일면과,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노래들이 대두된 것 또한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 향 악(鄕樂)
    고려 후기의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 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 형식의 장가(長歌)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속요는 <만전춘> ? <이상곡> 등의 곡처럼, '아소 님하'라는 짧은 결구를 끝에 단 긴 노래(長歌)이다. 이밖에 <쌍화점>은 '쌍화점' ? '삼장사'? '드레우물(蛇龍)'의 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사나 가락, 장구장단 등의 음악적 특징이 다른 향 악곡과는 구별되는 이색적인 곡이다. 즉 <쌍화점>은 향악인지 또는 호악(胡樂)인지 불확실하다.
    고려의 속악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됨으로써 그음악적 내용을 후대에 전하였다. 즉 <서경별곡>은 조선조에 창작된 <정대업>의 <화태>에, <만전춘>은 <정대업>의 <순응>에, <쌍화점>은 <보태평>의 <정명>에 각각 차용되었음이 악보 분석 결과 밝혀졌다.

    ♣ 당 악(唐樂)
    고려 전기에 들어온 당악, 정확히 말해서 송악(宋樂)은 여러 차례의 외침(外侵)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연향에서 향악과 대비를 이루며 좌방악?우방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송나라의 교방여악인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가 『고려사』 악지에 서술되어 있어 고려 후기에 존속하였음을 입증해준다. 또 한편 당악 중 <태평년> ?<수룡음> ?<억취소>등은 이전 시대에 순수한 아악 만이 제향에 사용되던 전례를 깨고 제향음악으로 채택됨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즉, 장단시로 되었던 이 음악들은 공민왕16년(1367)에 공주의 혼전(魂殷)에서 제향악 ?초헌악 ?아헌악 ?종헌악으로 사용되면서 4언 1구의 신찬(新撰) 가사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의 당악은 악기편성에 있어서도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즉, 고려 전기의 당악에서 사용된 쟁이 대쟁과 아쟁으로 바뀌었고, 대고 대신 교방고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여기에 퉁소가 새로이 채용되었다.

    ♣ 아 악(雅樂)
    고려 후기의 아악은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하여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여러 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말미암아,악공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악기가 손실되는 등 그 전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금?슬?훈의 악기가 아악편성에서 빠졌고, 결국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명 나라에서 편종?편경?생?소 금?슬?배소를 들여오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또 명종 때부터는 제향의 아헌악과 종헌악에 순전한 아악기 연주가 아닌 아악기와 향악기의 합주(鄕樂연奏)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아악의 정통성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371년, 공민왕이 아악의 부흥을 위하여 아악 전담부서인 아악서(雅樂署)를 신설하고, 명나라로부터 아악기 일부를 들여오는 등 아악복구작업을 일으켰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재향의 아헌과 종헌에 따른 향악교주는 교정되지 못한 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순 아악으로 개정되었다.
    [ 조선시대 ]
    조선 전기는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음악사의 특색은, 불교억제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 전래의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가 폐지되고, 숭유(崇儒)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禮樂)이 숭상됨에 따라 아악이 크게 일신된 점, 건국 대업을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신악(新樂)이 창작된 점, 이와 같은 음악제도를 잘 보존하기 위하여 『악학궤범』과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① 전기
    ♣ 아악기의 제작
    조선 전기의 아악기 제작 사업은 세종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세종 7년(1425)에 기본음 황종율관 길이(9寸)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거서가 해주에서 생산되고, 그 이듬해에는 (1426) 편경의 재료인 경석(努石)이 남양에서 발견되자 곧 율관과 편경의 제작을 실행에 옳긴 것이다. 율관 제작사업은 몇 번의 실험을 거듭한 끝에 1427년에 완성되었다. 박연(朴壞)이 기장알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완성한 황종율관은 해주에서 생산된 거서를 이용한 것이었지만, 그 음이 명나라의 편경 황종음보다 높아 곧 폐기되었다. 제2차로는 중국의 편경 황종음에 맞추어 율관을 제작하고 여기에 맞춘 편경 한틀 12장이 제작되었다. 그 후 거서를 쌓아 율관을 구하는 방법(累業法) 대신 후기법(候氣法)을 채용하는가 하면 대나무 율관 대신 구리 율관을 제작하였으며, 또는 주척(周尺)을 사용해 보는 등 그 기본음의 높이를 결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율관제작법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은 중국 황종음에 맞춘 황종율관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율관제작 사업은 악기의 조율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종률법(鐘律法)의 연구를 진작시켰다는 데 주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율관및 편경의 제작과 함제 조선 전기 아악기의 제작은 태종 6년(1406)의 경우와 같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필요한 악기를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 아악곡의 일신
    조선 초기의 아악은 대개 고려시대의 아악을 답습하였지만, 세종 9년(1427) 12월에 제향의 아헌 종헌?송신에 따르던 향악교주 전통이 폐지되고, 제향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악기만으로 연주하도록 새롭게 다듬어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는 재래의 아악곡이 폐지되고 새 아악곡이 제정되어 아악 역사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악 제정작업을 주관하고 있던 박연은 '당시 봉상시(奉常寺)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국 악장>의 음악내용은 등가와 헌가의 음악이 각각 음려와 양률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는 주례(周禮)의 음양합성(陰陽合聲)제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 출처도 불분명하므로 마땅히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악보로 원나라 임우의 『대성악보』를 천거하고, 이 악보에 전하는 아악 16곡 중에서 오로지 궁조(宮調)만을 사용한 12곡(蠻洗曲 제외)을 각각 12조(調)로 이조(移調)한 144곡의 새로운 제사음악을 제정하였던 것이다.이와같은 경위로 제정된 새로운 아악은 1430년 윤 12월에 발간된 『아악보』에 실렸다.

    ♣ 신악(新樂)
    조선 전기의 신악은 세종이 창작한 <봉래의> ?<발상> ?<보태평> ?<정대업> 등을 가리킨다. 세종대에 이르러 크게 진작된 신악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조선 초기의 악장인 <수보록> <몽금척> ?<근천정> ?<수명명> 등의 내용이 모두 태조와 태종만의 위업을 담고 있어,조종(祖宗)의 공덕과 조선건국의 간난을 두루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따라서,좀더 포괄적인 조선건국 음악의 필요성이 요구됨에 따라 장대한 신악제정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신악은 기존 음악에 바탕을 두고 새로이 요구되는 음악 형태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곡이 완성되기까지 사용된 재구성,즉 창작작업의 예를 보면,기존곡에 새로운 선율을 첨가시키거나(휴명-청산별곡, 화태-서경별곡, 형광-가시리의 관계), 기존곡의 선율 일부를 떼어내어 새 음악의 짧은 가사에 맞도록 압축시키는 형태(순웅-만전춘, 융화-풍입송의 관계)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청산별곡>과 <휴명>의 관계에서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향악의 첫 시작음을 궁(富)또는 하오(下五),즉 중심 음으로 고침으로써 본래 향악이었던 곡을 중국음악의 기조필곡(起調畢曲)의 체제로 만들었는가 하면, <쌍화점>과 <정명>의 관계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불규칙한 길이로 된 향악의 길고 짧은 음을 중국음악과 같이 규칙적 길이의 음으로 고친 예를 볼 수 있다. 한편, 세종 때의 신악인 <보태평>과 <정대업>은 여타의 곡과는 달리 특별한 변화를 겪는다. 본래 연향악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용을 곁들여 연행되어온 이 음악은 세조 때인 1464년 종묘제향악으로 채택됨에 따라 제향음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대업> 15곡은 <보태평>과 같이 11곡으로 감소되었다.
    둘째,선율의 길이도 연향음악으로서의 <정대업> <보태평>보다 짧아졌다. 셋째, 임종궁이었던 <보태평>과 남려궁이었던 <정대업>의 음악이 모두 청황종궁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음악들은 모두 기존의 향당악 편성에 편종?편경 축?어의 아악편성이 첨가되었다.

    ♣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및 악보출간
    정간보는 매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정간보에서 나타내는 음의 길이는 음이 쓰여진 정간 다음에 이어 나오는 빈 정간 수의 다소에 따라서 그 음이 길고 짧다. 정간보에 의한 기보법은 등시가(等時價)의 4음 1구로 된 아악에는 별 필요가 없지만, 불규칙적인 시가를 가진 향악 기보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세종 당시에 제정된 <정대업> ?<보태평> ?<치화평> ?<취풍형> 등의 신악이 바로 이 기보법에 의하여 악보화되었다. 창제 당시 1행 32정간으로 만들어진 정간보(『세종실록악보』)는 세조에 의하여 1행이 16정간씩 둘로 나뉘었고, 그 16정간은 3?2?3?3?2?3정간의 6대강으로 구분되어 악보를 읽는 데 편리하게 되었다. 1행 16정간 6대강으로 된 세조 때의 정간보(『세조실록악보』)는 15세기말 또는 16세기초의 것으로 보이는 『시용향악보』와 세조 때의 향악을 수록하고있는 『대악후보」에 사용되었는데, 마침 이 악보들은 고려시대 향악의 장단을 명시하고 있어 음악사의 귀중한 단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 정간보는 『금합자보』와 같이 합자보(合宇譜)의 기보방법을 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합자보』의 <여민락>과 <보허자>에서는 6대강 대신 4대강보를 사용하였다. 이와같은 4대강보는 조선 후기에 나온 『이수삼산재본금보』.『증보고금보』.『신증금보』 등의 금보(琴譜)에서도 발견된다.

    ♣ 악서찬집(樂書擺集)
    조선 전기의 악서찬집 사업은 일찌기 세종 7년에 박연헤 의하여 건의된 바 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고, 성종 24년에 이르러서야 『악학궤범』 9권 3책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악학궤범』은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오래되어 파손되었거나 비록 잘 보존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이 소략하고 틀린 점이 많아 이의 증보 교정이 필요하다는 성종의 명으로 장악원 제조 유자광(柳子光), 예조판서 성현(成混),장악원 주부 신말평(申末平), 전악 박곤(朴混)과 김복근(金福根)이 참여하여 완성되었다.『악학궤범』은 음악역사 서술을 일체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있는 그대로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와같은 『악학궤범』의 기술목적은 비록 악제와 악기가 산실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상대로 재현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는데, 실제로 광해군 때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악기와 악제가 모두 흩어지고 결락된 것을 『악학궤범』에 의하여 일무와 종묘악을 복구하는 데 공헌한 바 있으며, 이후로도 고악의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몇 권을 제외하고 산실된 『악학궤범』은 광해군 2년(1610)에 복간되 었고, 병자호란(1636) 후로는 효종 6년(1655)에, 그리고 아악 중수사업의 일환으로 영조 19년(1743)에 각각 복각되어 오늘날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이밖에 조선 전기에는 세종대의 율관제작에 따른 악리(樂理)연구, 세종의 정간보 창제와 세조의 그 개량, 『악학궤범』의 간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악학(樂學)의 발달을 보여준다.


    ♣ 당 악(唐樂)
    조선 전기에는 고려조의 당악, 즉 송악(宋樂)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의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는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계승되었고, 그밖에 조선 전기에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서 창작된 <금척> ?<수보록>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하성명> ?<성택< 등의 정재가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첨가되었다. 새로이 창작된 춤은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금척>을 제외하고 새로 지은 가사를 송악에 畿어 부름으로써 송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수보록>과 <수명명>에는 <보허자>가, <하황은>에는 <금전악>이, <하성명>과 <성택>에는 <하성조>가 각각 사용되었다. 한편,조선시대의 송악은 원가사 대신 본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태종?중종 때에는 『시경(誇經)』의 가사를 송악의 선율에 얹어 연향악으로 사용하였다. <녹명(鹿鳴)>의 가사를 <중강조>에, <사모(四牧)>를 <금전악>에, <황황자화(皇皇者華)>를 <전화지조>에 붙여 불렀던 것이다. 이와같이 송사(宋詞)의 원가사를 사용하지 않고 송악의 선율에 다른 가사를 담았던 이유는, 『성혼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송사의 내용 중에서 '풍정(風情)' ?'비단옷(締羅)' ?'분단장한 얼굴(粉面)'?'푸른 눈썹(拏鑛)'과 같은 표현들이 아악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고 취 악(鼓吹樂)
    조선시대의 고취악은 조종의 공덕을 칭송한 <수보록> ?<몽금척> ?<근천정> ?<수명명>을 포함하지만 그 악보가 전래되지 않고, 세종 때에 제정된 신악(新樂)중에서 <정대업> 중 <독경>, <보태평> 중 <계우>, <발상>, <봉래의> 중 <여민락> 등의 고취악은 악보로 전하고 있어 고취악의 음악내용을 알 수 있다. 고취악의 가사는 4언 1구의 한시로 되었고(몽금척은 예외), 그 음악은 1자 2?3음(一字 二音, 또는 三音)의 체제를 가졌다. 그리고 고취악은 4언 1구의 끝에 박이 한번씩 들어가며, 박 넷이 모여 장구형 하나를 이루는데,장구형 하나의 음악은 곧 4구 1장의 가사에 해당된다. 또, 가사1구 끝자에 붙는 음의 시가는 선행자(字)에 붙는 음의 시가와 같다. 이 점은 가사 1구의 끝이 2배로 늘어나는 송사와 다르며 오히려 아악과 유사하다. 다만 아악에서와 같이 엄격히 1자 1음씩이 아니고, 1 자 수음(數音)인 점에서는 아악과 다르다.

    ♣ 향 악(鄕樂)
    조선 전기의 향악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향악을 계승하였고, 『대악후보』.『시용향악보』 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다. 조선 전기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이다. <만대엽>은 고려시대 음악에는 보이지 않고 「금합자보』에 처음으로 보이는 음악으로서, 이 음악의 형성시기는 대략 조선시대 전기 말로 추측된다. 그 평조만 대엽은 고려시대 향악이 거의 다 없어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평조?우조 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의 <중대엽>과 <삭대엽>을 파생하였고, 평조 만대엽은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으로 조선조의 신곡이기 때문이다.


    ② 후기
    조선 후기는 광해군대로부터 고종말(1910)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는 중상층을 중심으로한 풍류음악의 발전, 일반 백성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민속음악의 발흥, 아악의 쇠퇴 등을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꼽을 수 있다. 음악의 갈래별로 그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 악(雅樂)
    조선 후기 아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단절과 복구의 격동을 겪었으나,그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 전기의 아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병자호란(1636)에서 인조 25년(1647)까지 약 1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사직(社程)?문묘(文廟)등의 제향아악은 다시 복구되어 그 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구된 아악의 규모는 매우 축소되었다. 즉, 『악학궤범』에서 62인으로 되어 있는 등가 악생의 수가 20인으로, 헌가의 경우는 124인에서 22인으로 감소되었으며, 특히 등가에서 악장을 부르는 가자(歌者)의 수가 『악학궤범』의 24인에서 4인으로 격감되었다.

    ♣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도 아악의 경우와 같이 병자호란 후 10년 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그 맥을 이었다. 연주규모도 감소되어 『악학궤범』에서 36인이었던 등가의 악공은 20인으로,72인이었던 헌가의 악공은 22인으로,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던 가자의 수는 인조 때의 6인에서 2인으로 각각 감소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종묘제례악>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 결관 <종묘제례악>은 향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였다. 즉,조선 전기의 <종묘제례악>은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가야금?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함께 편성되었으나, 이 향악기들은 숙종대 이후에 일차 헌가에서 빠졌고,그뒤로는 헌가에서마저 생략되어 악기편성의 면에서 향악의 요소가 거의 배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길고 짧은 음의 결합으로 연주되던 <종묘제례악>이 거의 등시가의 음길이로 변함으로써 향악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 전정헌가(殷庭軒架)
    전정헌가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9인이 연주하던 전정헌가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 그리고 인조 이후의 전정헌가는 『악학궤범』의 거문고?가야금?향비파 월금?대쟁?아쟁 등의 많은 현악기를 편성에서 제외시키고 관악기의 연주를 부상시켰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전정헌가에서 연주된 음악은 고취악 <여민락령>이다. 이 곡은 조선 초기에는 16정간 1행의 악보에서 4행마다 박이 들어가는 규칙적인 리듬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종묘제례악>과같이 박자가 없는 음악으로 변하였다.

    ♣ 전정고취(嚴庭鼓吹)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에서 편종?편경?삭고?응고?건고?축?어 등의 악기를 뺀 작은 규모의 연주 편성이다. 전정고취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50인이 연주하던 전정고취 악공의 수가 26인으로 줄었다.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와 같이 고취악 <여민락령>과 당악 <낙양춘>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순조 기축년(己丑年) 『진찬의궤』에 의하면, 전정고취가 왕세자의 입전(入嚴) 때에 <정읍 만기>를 연주하였다고 되어 있는데,본래 <정읍>은 <무고>의 반주에 사용된 음악으로 장단이 있는 음악이었으나, 이 음악이 전정고취에 연주됨에 따라 현행 <정읍>과 같이 장단이 없이 위엄 있는 곡으로 변하였다.

    ♣ 전후부고취(前後部鼓吹)
    임금의 행악(行樂)으로 연주된 전후부고취의 음악은 『악학궤범』에 당시 50인의 악공이 맡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 그 악기편성에 있어서는 전정고취와 거의 다르지 않다 전후부고취에서는 <여민락령>을 연주하였는데 이 음악은 현행 <해령>과 같이 박자 없는 화려한 관악으로 현악 <여민락>과 다른 느낌을 준다.

    ♣ 연 향 악(宴享樂)
    조선 후기 연향악의 변천과정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향악과 당악이 좌우로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연주전통이 지켜졌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악기와 향악기가 한데 섞여 연주(鄕唐交妻)하게 됨으로써,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없어졌다.
    둘째, 외진연(外進宴)과 내진연(內進宴)에 사용되는 춤의 내용이 각각 구별되어 고정되었다. 영조 19년(1743)에는 외진연 정재에서 무동(舞童)이 춤을 추고 제1작(酌) 초무(初舞)에 <보허자령>, 제2작 <아박>에 <정읍>, 제3작 <향발무>에 <보허자령>, 제4작 <무고>에 <향당교주>, 제5작 <광수무>에 <향당교주>를 쓰기로 정하였으며, 내진연 정재에서는 여기(女妓)가 춤을 추고 <헌선도>?<수연장>?<포구락>?<오양선>?<연화대> 등의 당악정재와 교주로 반주하였다. 이로써 조선 후기에는 여기(女妓)에 의한 송나라 대무(隊舞)가 외진연에서 사라졌고 내진연에서만 연행되었으며, 이때 연주되는 음악은 『악학궤범』당시까지의 송악(宋樂)이 아닌 <향당교주>로 단일화하였다.
    셋째, 향악정재 중 <아박>과 <무고>에 수반된 우리말 창사가 각각 칠언정구 및 오언율시의 한시로 바뀌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 후기의 연향악, 특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는 조선전기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던 구별이 거의 없어짐에 따라 『악학궤범』 소재의 향악?당악정재와는 매우 다르게 변화하였다.

    ♣ 정 악(停樂)
    정악이라는 용어의 뜻은 크게 두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정악은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백하고 복잡하지 않은 음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악은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琴歌)'와 통하는 점이 있다. 한편, 정악의 또다른 뜻은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산회상>?<여민락>?<보허자>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여기에서는 정악이라는 용어를 금가가 아닌 음률이라는 뜻으로 한정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여민락>은 <영산회상>에 비하여 금보에 기록된 것이 적다.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여민락>을 수용한 『신증금보』는 가사까지 병기(倂記)한 <여민락>의 전 10장의 음악을 완전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어은보』이래로 <여민락>은 가사 없이 제1장부터 제7장까지만 연주하도록 되어있으며(어은보에서 처음으로 장별 구분을 하였다.) 『삼죽금보』에서는 <여민락>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20박 한장단의 음악형식을 지키고 있으나 4장 이하에서는 10박 한장단단으로 변화하였다. <보허자> 또는 <보허사>(이 명칭은 어은보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수삼산재본금보』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이 악보에서는 미후사의 제1구, 즉 환두(換頭)부분까지 싣고있으며, 그 가사도 병기하였다. 그러나 『한금신보』 이후의 악보에서는 가사가 없어지고 장별구분이 생기게 되는데, 『유예지』부터는 현행같이 제5장부터 제8장까지의 음악이 20박 1장단에서 10박 1장단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보허자>는 몇 가지의 파생곡을 만들어냈다. 즉, <보허자>의 환입(換入, 또는 도드리) 부분을 20박에서 6박으로 변형시켜 파생된 곡이 <밑도드리>이며, 거문고 4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밑도드리>를 다시 거문고 7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곡이 <잔도드리>이다. 또한 『삼죽금보』 이후에는 <보허사>에서 파생된 또 다른 곡인 <양청도드리>와 <우조가락도드리>가 출현하였다. <영산회상>은 현행 <상영산>에 해당하는 곡이『이수삼산재본금보』에 맨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 악보에서는 '영산회상불후신'이라는 가사를 병기하였따. 그뒤 『한금신보』부터 가사가 없어졌고, 『유예지』에 이르러서는 곡 전체가 4장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어은보』이후로는 <상영산>의 파생곡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행 <중영산>에 해당하는 곡이 『어은보』에서는 '영산회상 갑탄'이라는 명칭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은 다시 『유예지』에 이르러 10박 한장단을 가진 <세영산>?<가락덜이>를 파생함으로써 연곡(連曲)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 『유예지』에서는 오늘날 <영산회상>의 한 곡인 <삼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타령>?<군악>등의 곡이 보이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곡은 서로 독립되어 있었고, 이곡들이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모음곡으로 형성된 것은 『삼죽금보』이후의 일이다. 이상엣와 같은 <영산회상>의 변모과정은 단순한 곡의 전승에 그치지 않고 변주, 즉 창작에 의한 전통의 발전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악보를 중심으로 살펴본 <여민락>?<보허자>?<영산회상>에서 보여주는 공통적인 변천은 『이수삼산재본금보』의 16정간 4대강으로 기보된 음악들이 『신중금보』에서는 20정간 4대강의 음악으로 변하고, 『유예지』에서는 20정간 4대강 한장단이 두장단으로 확대되는 변천이다. 즉, 이러한 변천은 음악의 속도가 촉급(促急)하여지는 것을 막고 완서(緩舒)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변천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은 음악의 변화는 정악의 본분을 고수하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 가 곡(歌曲)
    가곡은 거문고 반주를 필수로 하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금가는 『양금신보』시대만 하더라도 <만대엽>?<북전>?<중대엽>?<감군은> 등의 곡이 있었다. 그러나 <감군은>은 『신증금보』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만대엽>은 『어은보』이후로, <북전>은 『유예지』이후로 그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중대엽>은 『삼죽금보』에서 장단이 "의거하기 어렵게" 되어 실제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는 오직 <삭대엽>만이 많은 변천을 거쳐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삭대엽>, 즉 가곡은 <만대엽>?<중대엽>과 같이 5장과 중여음(간주곡)?대여음(후주곡)으로 이루어진 단형의 노래로 거문고에 의하여 반주되는 음악이다. <삭대엽>이 처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양금신보』(1610)이지만 실제의 악보는 『증보고금보』(1620~1680)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악보의 <삭대엽>은 우조?계면조(우조계면조)?평조?계면조평조(평조계면조) 등 4개의 조를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우조삭대엽> 2곡과 너머지 3조에 속하는 삭대엽이 1곡씩 수록되어 있다. 이후 <삭대엽>은 여러가지의 파생곡을 갖게 되는데, 『신중금보』(1680)에 이르러서는 위의 4조의 <삭대엽>이 각각 일?이?삼(一?二?三)의 세가지 곡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음악은 일(一)에서 이?삼(二?三)으로 진행됨에 따라 노래의 시작음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 뒤 『한금신보』에 이르러서는 4조의 <삭대엽> 중에서 우조와 우조계면조의 <삭대엽>이 삼(三)에서 사(四)로 늘어난다. 그 뒤 『유예지』(순조 경)에 이르러 <초엽>(초삭대엽)?<이엽>(이삭대엽)?<삼엽>(삼삭대엽)에 이어 <농엽(弄葉)>(계면조)?<우락>?<계락>?<편삭대엽>이 처음으로 추가된다. 그다음 『삼죽금보』(헌종 무렵)에 이르러서 <이삭대엽>과 <삼삭대엽> 사이에는 <조림(調臨)>(조은 자진한입, 두거)이 끼어들고 <삼삭대엽> 다음에 그보다도 더 높은 음을 내는 <소이(騷耳)>와 <소용(騷聳)>이 추가된다. 그리고 이 곡들이 <우조 소용이>에서 <계면 초삭대엽>으로 연속진행할 때 다리구실을 하는 <우롱> 또는 <반엽>이 생겼으며, '농'?'락'?'편'을 높이 질러내는 <언롱>?<언락>?<편락>이 더 추가되었다. 한편, 『삼죽금보』에서는 평조와 평조계면조 <삭대엽>은 없어지고 우조와 (우조)계면조만이 남았다. 그뒤 『현금오음통론』(1886)에 이르러서는 <이삭대엽> 다음에 <중거>와 <평거>가 새로이 추가되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 가사(歌詞)
    가사는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가곡이 음악 중심인데 비하여 가사는 음악보다는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이다.
    조선후기 『삼죽금보』에 이르러 가사는 일반 금보에 실리기 시작하는데, 가사와 금보에 실려 있다고 하여 거문고 반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즉, 가사는 보통 장구와 젓대 반주로 노래하며, 그 반주의 선율은 노래의 가락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가사는 <죽지사>?<어부사>?<춘면곡>?<상사별곡>?<권주가>?<백구사>?<길군악>?<처사가>?<매화가>?<양양가>?<황계사>?<수양산가> 등 12곡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곡수와 가사의 사설을 조선 후기에 간행된 노래모음집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청구영언』과 현행의 가사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청구영언』에서는 <춘면곡>?<권주가>?<백구사>?<군악>(길군악)?<관등가>?<중양가>?<귀거래>?<어부사>?<화산별곡>?<처사가>?<낙빈가>?<강촌별곡>?<관동별곡>?<양양가>ij<매화가>(매화타령)?<황계가>(황계타령) 등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백구사>와 <양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그 사설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 시 조(時調)
    시조는 일변 시절가(時節歌)라고도 한다.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는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시조의 발생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영조조의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일반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이 무렵부터 시조가 음악으로 널리 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가 처음으로 악보에 기록된 것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인데, 이에 실린 시조는 현행의 평시조에 해당한다. 그뒤 『삼죽금보』에는 평시조와 지금시조가 나오는데, 이 노래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졌다. 연대미상인 『장금신보』의 평시조와 지름시조도 역시 장별구분은 5장으로 되어 있고, 시조장단 그림은 1장?2장?3장을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장구점은 『방산한씨금보』와 비슷하나 여음이 매장단 끝에 있지 않고 3장 끝에만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한편, 『서금보』에서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각각 3장으로 나누어졌고 여창의 평시조와 지름시조도 3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방산한씨금보』에서는 시조의 3장형식과 장구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 판 소 리
    '타령' 또는 '잡가'라고 불렸던 판소리는 광대 한 사람이 소리와 말(아니리)로 <춘향가>와 같은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극음악이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 하나인 <춘향가>는 일찍이 18세기 중엽에 한문시로 소개되었다(유진한의 『만화집』).
    19세기 중엽 송만재의 『관우회』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 ?<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곡이 형성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의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이르면, 앞서 말한 12마당 중에서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등이 빠지게 되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집』에서는 이 중에서 <배비장전>과 <장끼타령>을 제외한 6마당만을 실었다. 1933년 이선유가 판소리를 정리한 『오가전집』에서는 신재효의 6마당 중 내용이 상이스러운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은 5마당의 소리만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판소리의 곡수가 점차 줄어드는 동안 판소리의 사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틀린이면ㅇ은 고치고, 판소리의 청중이었던 지식층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12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의 대본이 유식한 문자를 가장 많이 담고 있어 곡의 분량이 가장 많고, 따라서 이본(異本)가장 많다는 것은 판소리의 사설이 여러 가객의 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판소리의 음악도 역시 사설의 겨우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에 이하여 집대성되었다. 즉, 판소리의 음악은 여러 명창들이 각기 고유한 더늠(창작)을 첨가하여 나감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판소리의 이러한 더늠 대목은 비록 악보로 기록된 것은 아니나 구전(口傳)에 의하여 그 창작자와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 국악사 연표 ]

    년도

    시대

    내  용

     

    고구려

    10월 가무로 하늘에 제사하는 동맹(東盟)을 거행

     

    부여

    정월 제천(祭天) 에 국중대회 (迎鼓)를 거행

     

    10월에 가무로 하늘에 제사하는 무천(舞天)을 거행

     

    마한

    5월과 10월에 제천하고 무리지어 가무(歌舞)   

    28

    신라

    민속환강(民俗歡絳)하여 <도솔가>를 짓다.

    8월 보름에 가무백희(歌舞百戱)로 가배놀이를 하며 <회소곡>을 부름

    196-229

    신라

    물계자(勿稽子)가 금곡(琴曲) 작곡

    4세기

    고구려

    왕산악(王山岳)이 중국에서 보내온 칠현금을 개조하여 거문고로 만들고,

    이를 위해 100여곡의 작품을 작곡

    417-457

    신라

    <우식악> 연주

    453

    일본 윤공천황(允恭天皇)이 별세하여 신라에서 음악인 80인을 파견

    458-479

    백결선생이 아내를 위해 금곡(琴曲) 방아타령 작곡

    551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여 진흥왕 앞에서 연주

    554

    백제

    일본에 파견된 백제 음악인이 본국의 음악인과 교대하기를 청하다.

    589-600

    고구려

    고구려 음악이 중국 수(隋)나라의 궁정에서 7부기의 하나로 연주됨

    6세기

    가야

    가야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고 악사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위해 작곡함

    612

    백제

    백제인 미마지(味麻之)가 일본에 기악무(伎樂舞)를 전함

    611-617

    신라

    원효의 <무애가>

    651

    음성서(音聲署)에 대사(大舍) 2인을 임명

    673

    통일신라

    김유신이 별세했을 때 임금이 군악고취 100여명을 보냄

    681-691

    동해 상에 떠오른 작은 산에서 대를 베어 젓대를 만들고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명명

    756

    신라의 가야금, 백제의 관악기 등을 일본 동대사(東大寺)에 보냄

    830

    진감대사가 당에서 배워온 범패를 하동의 쌍계사에서 가르치기 시작

    861-874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 곡을 짓고, 제자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통일신라에 거문고 음악이 널리 퍼지게 됨

    888

    대구화상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 간행

    918

    고려

    국중대회인 팔관회를 거행

    1010

    중단하였던 연등회를 다시 시작

    1053

    궁정 음악인 중에 자제 3-4인이 있을 경우 그 중 하나가

    음악인의 업을 잇게 함

    1073

    연등회, 팔관회에서 당악정재 <답사행가무>, <구장기별기>, <포구락>

    등을 연행함

    1078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오면서 박판, 적, 피리 등을 예물로 가져옴

    1114

    송나라에서 새로 제정한 연향악(大晟新樂)의 악기, 악보 등을 보내와

    고려에서 연주하다.

    1116

    송나라에서 아악기, 아악보, 의물 등을 보내와 최초로 아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다.

    1151

    겨울 나례(儺禮)에서 정서가 <정과정곡> 작곡

    1370

    명나라에서 아악기를 보내옴

    1378

    박연 탄생(1378-1458)

    1389

    십학(十學)에 악학(樂學)을 둠

    1391

    아악서를 두고 종묘악가를 익히게 함